아베의 발밑 가시가 된 오키나와 미군기지

2015.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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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jpg

 언론매체들은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이웃국가들 간 고조되고 있는 긴장감에 대한 기사는 많이 쓰면서도, 오키나와와 도쿄 또는 오키나와와 워싱턴 간 마찰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현의 주민들은 18년 전부터 이 두 정부(일본과 미국)가 결정한 오키나와 북부의 헤노코 미 해군기지 신설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2년 12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아베 신조 총리는 최우선 과제로 이 프로젝트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전례 없는 강력한 저항세력과 마주하고 있다.

  2015년 4월, 아베 총리는 미 의회에서 헤노코 군사기지와 같은 특정 의제를 거론할 때, 민주주의의 '공유가치', 즉 법률과 인권존중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며 의원들을 강력하게 설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국 방문 한 달 후, 오나가 타케시 오키나와 지사는 워싱턴을 방문해 신설 군사기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아베 총리의 말을 반박했다.

   대만과 일본 최남단 섬인 규슈 그리고 오키나와의 섬들 간엔 1,000km의 해안선이 펼쳐져 있다. 중국입장에서 보면, 이 해안선은 태평양 접근을 좌지우지하는 잠재적인 “거대한 장벽”이다. 예컨대, 이 지역이 동아시아의 군사력 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에 이 섬들은 류큐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이 섬들은 전 근대국가인 중국과 일본에 정치적으로 의존해 있는 상태였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1) 5세기 동안 동중국 해안에서 평화를 누렸다. 1850년대만 해도, 류큐 왕국은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등과 조약을 협상하던 독립 국가였다.

 하지만 이 같은 상대적인 자치는 1870년대 막을 내렸다. 1868년 등장한 현대 일본 (메이치)정부가 류큐 왕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는 구실로 징벌차원에서 왕국을 붕괴시켜 일본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후 왕국은 오키나와현이 되었고, 왕국의 수도 나하를 굽어보던 슈라성(城)은 오키나와 최초의 군사군지로 전락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고유 언어사용 금지, 일본식 이름 사용, 신사참배 채택 등과 같은 강제 조치가 내려졌다. 

  일본 측에서 보면, 오키나와의 합병은 중국과 미국에 대한 반감의 징표이다. 이는 1945년의 참상으로 이어진다. 1945년 3월과 6월 말(2) 두 차례에 걸친 미국의 오키나와 폭격으로, 오키나와 주민 4분의 1이 사망했다. 많은 주민들이 간첩활동으로 기소되어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거나 집단 자살을 해야 했다(때로는 일가족 전체가 자살했다). 이 같은 트라우마는 오키나와인들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주년을 맞은 일본이지만, 미군은 여전히 오키나와 영토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4분의 3이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은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모든 주둔군을 철수시킨 후에도, 20년 동안 (1972년까지) 지속적으로 오키나와를 직접 통치했다. 물론 통치하는 영토가 당시보다 조금 줄기는 했지만 현재도 이들은 여전히 오키나와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헤노코에 건설하기로 한 군사기지는 오키나와 섬 남쪽에 위치한 기노완시 한복판에 들어선 후텐마 기지를 대체하는 것이어야 한다. 후텐마 기지의 격납고와 활주로는 학교, 병원, 거주지와 인접해 있다. 그래서 거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후텐마 기지는 전 미국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의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이다. 천만다행으로 8월 방학이라 희생자가 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2004년 오키나와 국제대학교를 덮친 군용 헬기 추락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훨씬 넓고 다양한 기능을 갖춘 후텐마 기지 대체시설(FRF)은 육·해·공군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헤노코 동쪽만과 오우라 서쪽만을 마주하고 있는 수심이 깊은 바다 위 160ha에 걸쳐 항구를 건설할 수밖에 없다. 이 기지는 바다 위로 10m 높이로 솟아오른 콘크리트 덩어리, 즉 1,800m에 달하는 두 개의 활주로와 272m의 부두로 구성된다.

 그러나 기지가 들어설 곳은 일본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해안 중 하나로 자연 보호구역이다. 일본 환경부 장관도 이 지역을 유엔 산하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싶어 한다. 또한 이곳은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다. 산호, 갑각류, 해삼, 미역, 수백 종의 새우, 달팽이, 물고기, 거북이, 포유동물 등은 물론 멸종위기에 처한 많은 희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해안에 들어서게 되는 미군기지

 

  만약 이 기지가 건설되면, 21세기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이 가장 밀집된 기지가 될 것이다. 이는 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공들이는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정책(3)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씁쓸한 일지만, 1996년 이들은 후텐마 기지의 이전을 아무런 조건 없이 약속했다. 아베 정부는 해군은 국방의 축이기 때문에 헤노코가 제격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014년 초반 국방장관 나카타니 겐은 후텐마 기지를 규슈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못할 군사적인 또는 전략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만, 도쿄의 반대가 유일한 걸림돌이라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4)

   사실, 후텐마 해군기지는 첫 단추부터가 잘못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머릿속엔 ‘총검과 불도저’를 동원해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불법 조성한 것이 곧 후텐마 기지라고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기지의 위험이나 소음 혹은 유해함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당장 폐쇄해야 한다고 여긴다.

  대부분의 오키나와 주민들은 기지 이전에 반대하고 있다. 오키나와현 지사를 비롯한 도·시 의원들과 일본 주요 정당의 오키나와 지부 소속 정당인들 그리고 <류큐신문>과 <오키나와타임스> 등도 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초기 몇 년은 기지 이전 프로젝트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2013년 초반부터 제2기 아베 정부는 이들 세력을 무력화했다. 우선, 아베 총리는 본인이 대표로 있는 자민당 소속의 오키나와 지역구 의원 3명을 설득해 자기 진영으로 끌어 들였다. 이어 그는 자민당 소속의 오키나와 도의원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나카이마 히로카즈까지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지지기반의 잇단 이탈에 분개한 해군기지 이전 저지세력은 2014년 한 해 동안 치른 일련의 선거에서 승리하며 반격에 나선다. 이들은 1월에 치른 오키나와 북쪽에 위치한 나고시(市)의 시장 및 시의원 선거, 11월의 주지사 선거, 국회의원 4석이 걸린 12월의 국회의원 선거 등 모든 선거를 승리로 장식했다. 오키나오현 지사 선거 때, 보수성향의 후보 오나가 타케시는 섬을 수호하기 위해 공산당과 보수당 등 모든 정당을 아우르는 슬로건 “오키나와는 하나다”란 정책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또 기지 이전 프로젝트를 막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유권자 64%가 참여한 기록적인 투표율을 자랑하는 이 선거에서, 그는 당시 시장을 10만 표(그는 36만 800표를 얻은데 반해 상대방은 26만 1천표를 얻음) 차로 크게 이겼다.

 그럼에도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기 때문에 정부는 기지 건설을 착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2014년 7월에 시작했던 군사기지 공사 예비심사는 11월 국회의원 선거기간 동안 중단되었다가, 2015년 1월 다시 재개되었다. 아울러 아베 총리도 경찰폭동진압대와 해안경비대를 동원해 기지건설 반대 시위대를 저지하는 충격과 공포 전략을 채택했다. 일례로, 지난 3월 4일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일종의 현악기) 음악축제 때, 29명의 음악인들은 기지이전 반대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해군기지가 들어설 장소 외곽에 모여 클래식 음악공연을 개최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연은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찰폭동진압대에 의해 중단되고, 비를 피하기 위해 이들이 설치한 간이시설도 철거되었다.

  2015년 1월, 오키나와현 지사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을 허락한 전임 지사의 이전계획 과정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기 위해 이른바 ‘제 3의 길’이라는 전문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이전 과정이 제대로 진행된 것인지, 이 계획을 철회시킬 순 없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쿄당국이 의뢰한 공사 사전점검 작업으로 인해 산호들이 손상되고 있다며 도쿄당국에 작업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나가 오키나와현 지사로 당선된 이후 4개월 동안, 일본 정부는 그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과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라는 나카타니 겐 국방장관(5)의 말은 이런 상황을 암시한다. 2015년 4월과 5월, 오나가 오키나와현 지사는 마침내 총리, 내각관방장관, 국방장관 등과 면담을 가졌다. 하지만 이 회동으로 인해 이들 두 진영 간에 골만 더 깊어졌다. 오나가는 이들에게 “당신들이 거만하게 굴면 굴수록 오키나와 주민들은 당신들한테서 등을 돌릴 것이다”라고 말해 섬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베 총리를 접견한 그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땅을 강탈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군사기지를 짓더니, 이젠 이 기지가 쓸모없는 곳으로 전락했으니 세상에 이보다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직격탄을 던졌다. 그러자 아베 총리는 약속했던 5분 연설을 3분 만에 중단한 채 기자들과 함께 서둘러 회견장을 빠져 나갔다.

 

아베 정권에 정치적 부담감을 주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일본 총리는 전례 없는 국회 장악력을 선보이고 있다. 야당은 분할되어 약화되고, 대부분의 일본 주요 언론들도 정부를 거들고 있다. 아베 총리가 언론계 거물들과 골프 회동을 갖고 사교파티에서 이들과 조우하는 것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회와 언론계를 뺀 일본인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들의 기지건설 반대투쟁을 강력 지지하고 있다.

  2013년 워싱턴 방문 때, 아베 총리는 환대를 받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저녁 만찬이나 기자회견도 없었다. 그의 발언들, 예컨대 '재도약하고 있는 일본,' '전후 체제와의 단절,' '일본이란 이름에 걸맞은 역사를 가르쳐 일본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겠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미국 정치인들의 심기만 불편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는 미국이 만들어 놓은 일본의 전후 체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일본이 군국주의와 파시스트 성향에 애착을 보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 후 아베 총리가 워싱턴을 재방문했을 때, 그 앞에는 붉은 카펫이 깔렸다. 그는 상·하의원들이 집결한 의회에서 연설도 했다. 이 같은 반전의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워싱턴의 '일본 자문단'이 요구한 일정을 최우선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베는 미국의 요구대로 과거 60여 년 동안 일본정부가 중시하던 노선으로 복귀했다. 이어 그는 자위대의 군사 개입의 범위를 확장하고 앞으로 세계 어디든 간에 '자율적으로 연합군에' 자위대를 파견할 수 있도록 일본 헌법도 손질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군 22만 5천명을 미군에 배속시킨 데 이어, 일본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미군 주둔 유지비용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연간 86억 달러(6)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베는 헤노코에 미 해군기지를 신설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괌과 마리아나 제도의 신설 미군기지의 자금 28억 달러도 대부분 직접 조달해주겠다고 호언했다. 여기다가 해군 8천명의 이전비용을 합하면, 아베정부가 미국에 지불하게 될 총 보조금의 규모는 60억 9천만 달러에 달한다.

 아베 총리는 이를 두고 일본이 1947년부터 중시해온 헌법에 명기된 평화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이른바 “긍정적인 평화주의” 행위라고 일컬었다. 그러자 존 매케인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아베 총리의 발언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갈 요량으로, <재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긍정적인 평화주의’란 일본자위대를 한국을 비롯한 중동과 남중국해에 파견하겠다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했다.(7)

   제2차 세계대전 패전 70주년을 맞은 일본은 어쩌면 일본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친미활동을 하는 국가 지도자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워싱턴에 대한 아베의 행동은 노예근성과 깊은 적대감이 뒤섞인 이상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한 노예근성과 민족주의의 확립이라는 두 기치를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근대 일본의 근본적인 모순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8)

   그는 당장 오키나와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럴 방도가 전혀 없다. 일본에서 그의 지지기반이 붕괴되자, 일본 정부도 이 일을 해결하는 데 미온적이다. 4억 6천만 달러에 달하는 헤노코 기지건설에 대한 첫 계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공사 착공을 지시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7월 16일 전문위원회 ‘제3의 길’은 보고서를 통해 기지건설 허가 과정에서 전임 지사가 여러 부정을 저질렀음을 지적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오나가 지사는 9월에 이 사건을 제네바의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편 지난 8월 4일, 아베 정부는 오키나와현 지사와 4개 부문에서 협상을 타결했다고 발표했다. 첫째는 협상을 시작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8월 10일부터 9월 9일까지 공사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오키나와는 모든 법적조치를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넷째는 지사의 요구대로 오우라만(灣)의 산호에 대한 영향평가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는 착공을 너무 오랫동안 지체할 수 없는 처지이다. 왜냐하면 태풍이 닥치면 공사를 거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같은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를 보면, 아베 정권에게도 오키나와의 마찰은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는 셈이다.

  한 달 간의 휴전 끝에, 아베 총리는 어쩌면 자신의 의지를 오키나와현에 관철시키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단지 신설기지건설 중단 요구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군사기지의 폐쇄를 요구하지 않을까.

  

 

(1) 동아시아의 중심, 중국은 이웃 국가들에게 충성 맹세를 대가로 무역권을 제공하고 있다.

(2)  오키나와 전투의 가장 끔찍한 행위는 3월 26일부터 벌어진 케라마제도 전투였다. 이 전투는 미군이 이 섬에 상륙한 1945년 6월 22일까지 지속되었고, 미군은 이 섬을 후방 폭격기지로 활용해 일본 전역을 점령했다.

(3) Michael T. Klare, ‘펜타곤이 태평양으로 기수를 돌릴 때(Quand le Pentagone met le cap sur le Pacifiqu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3월.

(4) <Okinawa Taimusu>, Naha, 2014년 12월 25일.

(5) <Okinawa Times>, Naha, 2015년 3월 13일.

(6) Estimations : 2012.

(7) <McCain : SDF should expect to see action in Korea, deploy to Mideast, South China Sea >, <Japan Times>, Tokyo, 2015년 5월 2일.

(8) Bruce Cumings, ‘의심의 시기를 맞은 미일 커플(Le couple nippo-américain à l’heure du soupç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9년 4월.



글·가번 맥코맥 Gavan McCormack  호주 국립대 명예교수  
 

웹사이트 저팬 포커스(Japan Focus)의 코디네이터. 최근에 사토코 오카 노리마츠와 함께 <일본과 미국에 맞서 저항하는 섬, 오키나와(Resistant Island : Okinawa confronts Japan and the United States)>(Rowman & Littlefield, Lanham, 2012)를 출간했다.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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