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신호등의 여유와 더불어 사는 삶

2015.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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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몇 십년전 독일의 북부 도시 브레멘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일요일 오전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교회를 가는 길이었다. 조금 늦게 출발한 지라 조급한 마음이 일었다. 가는 도중에는 여러 신호등을 만나게 된다. 빨간색 신호등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다 노란색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출발했다. 다섯살 딸이 화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노란색에서 출발하면 안 돼, 그러면 사고나.” “응 아빠가 바빠서···” “그래도 안돼, 노란색은 다른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호해 주는 신호야. 그건 약속이야.” 딸아이는 아빠가 지켜야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속상해서인지 울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달랬다.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을 가르치는 곳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치원으로 딸아이를 데리러 갔다. 학교 강의가 끝나 집으로 가기 전에 내가 아이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는 시간 캐톨릭 교회 소속인 유치원을 들어섰다. 인사를 하는 나를 유치원 선생이 알아보고 반갑게 맞는다. 아이를 기다리는 사이 유치원 선생님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일요일 노란색 신호등에서 차를 출발시켰다는 이야기를 딸아이가 했다는 것이다. 그냥 그 때 그랬었느냐?”는 정도로 아이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차에 묻는 물음이려니 생각했다. 별 부담없이 그랬었다고 했는데, 그 것 때문에 딸이 울었다는 이야기도 자기가 알고 있다고 한다. 나는 딸아이가 어떻게 그런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그 때 그 유치원 선생님의 말은 참으로 멋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잊지않고 나를 흔든다. “유치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사는 것인지를 가장 먼저 배우는 곳이죠, 교통 신호를 지키는 것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중요한 약속이니까요.” 나는 순간 멍했다. 그 선생님은 노란색 신호등에는 약속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여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까지 곁들인다.


신호예측 출발금지라는 팻말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나는 우리 사회와 많이 비교하게 된다. 우리에겐 그런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신호등이 있는 곳에 심심찮게 신호예측 출발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곳은 아마 한국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만큼 다들 급하다. 여유가 없으니 남을 위한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릴 때 배워야 할 더불어 사는 삶은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유치원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삶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남을 제치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는 곳이 되어버렸다. 온갖 학습지를 해야 하고, 초등학교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한글을 깨우쳐야 하는 필수코스다. 다들 그러니 모두들 그럴 수밖에 없다. 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보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학원이나 마찬가지다. 유치원이 공교육이 되었으나, 각종 명목의 부담을 준다. 독일 가정은 부모의 아이들에 대한 소위 밥상머리 교육이 의외로 엄격하고 철저하다. 집에서 엄마 아빠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더불어 사는 방법과 약속의 지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 혼자만 잘나야 한다는 것은 없다. 식당에서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아이 기죽인다고 아무 말도 못하는 사회가 한국이다. 미안하지만 독일에서는 생각조차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여지없이 전 세계에 드러냈던 조현아의 땅콩 회항사건도 구태여 말하자면 어릴 때 배워야 했던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지 못한 탓이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가진 지위는 상대와 주위가 있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정도 학교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다. 아니 그럴 시간이 없었다. 모두들 너무 바쁘게 살 수밖에 없으니까. 윤일병 사건도 이와 전혀 다를 바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은 바로 틀린 생각으로 받아들이다. 그래서 인정하지도 묵과하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의 많은 청소년들이 본데없이 과격하고 버릇없는 것은 어릴 때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고 지식만을 강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여유를 갖게 하지 못한 잘못이 우리 기성세대에 있다.


 상대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 더불어 삶   

 

더불어 삶은 상대의 삶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정은 이해가 그 바탕이다. 이해하지 않으면 인정도 없다. 이해는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시각(視角)을 바꾸는 것이다. 바뀌어지는 것이 아닌 의도적인 바꿈이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한 가지 표현 방식에서 다른 표현 방식으로의 변환이다.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인정이 가능하다. 인정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적, 상호적 존재를 특징짓는 개념이다. 헤겔은 인정을 "타자에게 있으면서 자기에게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칸트는 그것을 '도덕적 인격의 존중'이라고까지 했다. 얼마나 고상한 말인가? 남북한이 서로를 바라보는 입장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한다. 우월적 입장이 아닌 북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인정이다.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야 남북관계의 개선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2015년은 우리 모두 노란색 신호등의 여유와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


**이 칼럼은 남북 물류포럼과 공동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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