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인물 열전-존 브래들리

2014.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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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당신은 존 브래들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까지 살면서 존 브래들리의 얼굴을 적어도 한 번은 보았다. 퓰리처 상을 받은 유명한 전쟁 보도 사진으로 전 세계인에게 얼굴이 알려졌지만, 알려져야 할 필요가 없어지자 철저한 무명인으로 돌아간 인물. 그런 존 브래들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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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 통신의 조 로젠탈이 촬영한 스냅 사진. 우리가 적어도 한 번은 보았던 그 사진이다.두 번째 성조기 게양 장면이었다. 여기서 오른쪽 두 번째, 유일하게 옆얼굴이 나온 병사가 바로 존 브래들리이다. 로젠탈은 이 사진으로 1945년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본론을 꺼내기 전에, 이번에 다룰 인물이 나온 어떤 사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사진은 아마도 전쟁 보도 사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일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누구건 간에,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선을 다룬 자료를 건성으로라도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거기에서 이 사진을 적어도 한 번은 보았다. 힘찬 동세와 안정적인 삼각구도를 갖춘 이 사진은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확 사로잡는 멋지고 감동적이며 장엄한 것이었다. 이 사진은 사진을 찍은 나라의 완전한 승리를 상징하며, 그 나라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부심을 절로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사진을 본 그 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사진은 그 촬영된 배경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때문에 이 사진은 결코 조작이나 연출된 사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자를 시기한 인물들과 호사가들에 의해 조작’, ‘연출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사진에 뒤집어 씌워진 그 어두운 아우라가 그 속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까. 사진에 나온 여섯 사람들의 최후는 하나같이 비참했다. 세 명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진이 촬영된 외국에서 전사했다. 고국으로 살아 돌아간 세 명 중 한 명은 알콜 중독자가 되어 30대 젊은 나이에 객사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직장에서 죽었다. 이 사진 속에 유일하게 얼굴이 나왔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명은 이 사진에 대해 끝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숨을 거두었다. 마치 이 사진에 대해 입을 열면 저주라도 받는 듯이.

무슨 납량특집 괴담 같은 느낌마저 들지 모르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엄연히 사실이다.

이번 글에서 다룰 인물은 이 사진에 촬영된 사람 중 끝까지 살아남았던 미 해군 병장 존 헨리 브래들리(John Henry Bradley)이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1945년도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의 수상작인 <이오지마에 게양되는 성조기(Raising the Flag on Iwo Jima, 촬영자 조 로젠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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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병장 존 헨리 브래들리. 조 로젠탈의 사진을 모티브로 만든 <마이티 세븐스>의 포스터 앞에 선 모습이다. 촬영 당시에는 아직 부상이 완쾌돼지 않아 목발을 하고 있었다.

   

 

지상전을 기피하기 위해 미 해군에 입대


존 브래들리는 1923710, 미국 위스콘신 주 안티고에서 제임스 브래들리와 캐서린 브래들리 부부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브래들리는 철도 노동자로 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존 브래들리가 만 6살이 되던 1929, 세계 경제 대공황이 발생했다. 제임스 브래들리는 직장이던 철도 회사에서 정리 해고되었고, 가정을 부양할 방법을 찾아 애플턴으로 이주했다. 존 브래들리는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신문 배달을 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가풍을 이어받아 종교적이고 근면하고, 박애주의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장의사 활동에 관심을 가져, 애플턴의 장의사에서 18개월을 근무하고, 견습 장의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이미 1939년부터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에 휩싸여 있었고, 미국 역시 194112월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위시한 추축국 진영에 선전포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전간기 약소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던 미군의 규모는 1940년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크게 늘어나게 된다. 존 브래들리 역시 군대에 가야 했다. 이 때 제1차 세계대전에 육군 병사로 참전했던 아버지 제임스 브래들리는 아들에게 육군이 아닌 해군 입대를 권했다. 제임스 브래들리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참호전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반면 해군에 입대해 함상 근무를 하면, 설령 죽을 때 죽더라도 육군에 비해 훨씬 안락한 군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존 브래들리가 견습 장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 의무병과 등의 비전투병과로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도 한 몫 했다. 존 브래들리도 아버지의 그런 충고를 받아들여, 19431월 미 해군에 입대 지원을 한다. 해군의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해군 당국은 그가 견습 장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 같은 해 3월 해군 의무학교에 입교시켜 후반기 교육을 시킨다. 그는 같은 해 가을 오크놀 해군 병원에 배치받는다.

 

해병대 의무병으로 배치되어 사상 최악의 지상전에


그러나 그의 행운도 거기까지였다. 그 해 11월 신규 해병사단인 제5해병사단 <스피어헤드>가 창설되면서, 이듬해인 19443월 존 브래들리는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야전 의무학교를 속성으로 수료하고, 그 다음 달에 이 사단의 의무병으로 전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존 브래들리는 이 사단 예하의 제28해병연대 제2대대 E중대 제3소대에 배치되었다. 5해병사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치른 주요 전투는 단 한 건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1945219일에 벌어진 이오지마(硫黃島) 전투였다.

이오지마는 어떤 곳이고, 왜 그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가? 1942년 미드웨이 전투와 1943년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승리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압도하게 된 미국은, 1944년 여름에는 마리아나 군도를 일본으로부터 빼앗고, 이 섬에 B-29 전략폭격기 기지를 지은 다음 이 해 10월부터 이곳에서 B-29를 발진, 일본 본토 폭격에 나선다. 그리고 그 폭격기 항로 한복판에 면적 21km2의 작은 섬 이오지마가 있었다. 이오지마는 도쿄로부터 무려 1,200km 떨어져 있었지만, 전쟁 전부터 도쿄 도지사가 행정책임을 지고 일본인들이 살고 있던 일본 본토였다. 일본은 이 섬에 전투비행대와 레이더 기지를 배치, 본토로 향하는 B-29 편대를 조기 발견해 일본 본토에 경보를 보내고, B-29 편대를 요격했다. 만약 미군이 이곳의 일본군을 일소하고 섬을 점령한다면, B-29 편대에 가해지는 일본군의 위협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곳을 B-29의 비상착륙 장소 겸 호위 전투기 기지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점령하고자 우선 1944128일부터 72일간 각종 항공기를 동원해 맹폭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현대 상륙전 이론을 완성한 미 해병대의 명장 홀랜드 스미스(Holland Smith) 장군 예하의 증편된 3개 해병사단(3, 4, 5해병사단) 7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이 섬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 섬은 일본 본토였으므로 일본의 방어대책은 식민지에서 벌어졌던 이전의 전투와는 격이 달랐다. 우선 지휘관부터 최정예였다. 이오지마 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천황 근위사단장 출신의 명장인 쿠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 장군이었다. 육군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에도 유학한 엘리트인 그는 오직 근성만을 강조하던 대부분의 일본군 지휘관과는 달리 미국의 실체를 바로 파악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장 중 하나였다.

그는 이 섬에 23,000여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1944년 여름에 상륙했다. 과거 일본 식민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이 상륙한 미군에 맞서 해안에서 만세 돌격으로 잘 알려진 무모한 돌격전투만을 벌이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휘말려 빠른 속도로 전력을 상실, 결국 괴멸하고 만 점을 간파한 그는, 이오지마에서는 무절제한 돌격 및 해안방어를 지양하고, 대신 섬 전체를 꿰뚫는 총 30km 길이의 터널 시스템을 건축했다. 이 터널은 이오지마에 설치된 토치카 등의 대부분의 방어 설비와 연계되어, 한 방어 설비의 인원이 전멸해도 바로 새로운 인원을 보낼 수 있었으며, 막사, 병원, 탄약고 등 생활과 전투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완비되어 전전 이오지마 인구(800)의 약 30배에 달하는 막대한 병력이 지낼 수 있는 거대한 지하도시였다. 이 지하도시는 미군의 사전 폭격으로도 붕괴되지 않았으며, 폭격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계속 강대해져만 갔다.

간단히 말해 미국의 이오지마 상륙작전 <디태치먼트> 작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륙작전보다는 중세식 공성전에 더 가까운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중세의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치 많은 병력이 지키는 거대한 성을 공략해 점령하는 전투였다. 이오지마 전투가 전사상 가장 치열하고 잔혹무비한 전투의 반열에 오를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미군은 전투 전 이 섬에 배치된 일본군 병력 수를 16,000명 정도로 실제보다 적게 오판하고, 이 섬을 점령하는 데는 1주일 이상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이 전투에서 무려 15,000여 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처절한 이오지마 전투 속 국기 게양 사진의 비밀 

 

작전 개시일인 1945219, 드디어 이오지마 해안에 미 해병대가 상륙을 개시하자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던 일본군으로부터 치열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날 하루동안 발생한 미군 전사자는 무려 566. 6개월 동안 지속된 과달카날 전투의 전사자가 불과 1,500여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명손실이었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D+4일인 223, 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166m 높이의 스리바치 산을 포위한 후,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제5해병사단 제28연대 제2대대 소속 1개 소대 규모의 정찰대를 투입한다.

예상에 비해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오전 1020, 스리바치 산 정상을 점령한 미군 정찰대는 가져온 성조기를 휘날렸다. 사상 처음으로 일본 본토에 휘날린 외국 침략자들의 깃발이었다. 그 역사적인 모습을 본 섬 위의 미 해병대는 물론 섬 앞바다의 미 해군 함대에서는 엄청난 환호성이 울렸다. 그러나 앞서 말한 우여곡절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 때 함대에 동행했던 미 해군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은 이에 크게 감동해 게양된 성조기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큰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국기를 게양했던 해당 부대 대대장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먼저 게양된 성조기를 대대 금고에 보관하고, 대신 더 큰 성조기를 게양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날 12시경, 처음 세웠던 성조기는 철거되고 대대장이 올려보낸 더욱 큰 성조기가 미 해병대원 마이클 스트랭크, 할론 블록, 프랭클린 수슬리, 아이라 헤이즈, 레니 개그논, 그리고 미 해군 의무병 존 브래들리의 손에 의해 스리바치 산 정상에 게양된다. 여기에는 AP통신의 종군기자 조 로젠탈이 동행, 성조기 게양 순간의 스냅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 스냅 사진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신이 없던 그는 만약을 위해 주변에 있던 18명의 해병대원들을 불러모아 게양된 성조기 앞에서 환호성을 지르게 하는 연출 사진을 추가 촬영한다. 그리고 여기서 촬영한 사진들을 모두 본사에 보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얄궃은 운명은,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잊을만 하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도시전설, 조 로젠탈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성조기 게양 사진은 조작되고 연출된 엉터리라는 괴담을 만들어냈다. 이는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들에게는 크나큰 마음 고생을,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가막힌 입방아 소재를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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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의 루이스 R. 로워리 하사가 촬영한, 이오지마 섬 스리바치 산에서의 첫 번째 국기 게양 모습. 그러나 이 사진은 두 번째 국기 게양 모습을 담은 사진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1020분경에 있었던 첫 번째 성조기 게양 때도 해병대의 종군기자 루이스 R. 로워리 하사가 사진을 찍었고, 그 역시 그 사진을 미 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첫 번째 국기 게양 장면을 담은 로워리의 사진보다, 두 번째 국기 게양 장면을 담은 로젠탈의 스냅 사진이 미 본국에 더 먼저 도착했다.

게다가, 당시 이오지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조기가 두 번이나 게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성조기를 게양한 부대인 제28해병연대 제2대대의 전투 보고서에조차도 두 번째 성조기 게양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교체용성조기 게양을 굳이 보고서에 적을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었다. 미 본토에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알 턱은 더더욱 만무했다. 따라서 미 본토에서는 본국에 먼저 도착한데다 더 멋있기까지 한 로젠탈의 사진이야말로, 이오지마에 처음으로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을 포착한 진짜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 로젠탈 본인은 엉겁결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찍은 그 사진이 신문에 나갈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사진이 신문에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게양된 성조기 앞에 해병대원 18명을 모아놓고 찍은 연출 사진이 나갔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언론에 보도된 나의 성조기 게양 장면 사진은 연출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순간을 포착한 로젠탈의 사진은 스냅 사진 치고는 너무나도 균형 잡히고 멋있었던지라, 사람들은 로젠탈의 이 말을 조작 및 연출 혐의를 시인하는 자백으로 여겼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로젠탈이 찍은 두 번째 성조기 게양 순간을 담은 스냅 사진은 정말 멋지고, 장엄하며 감동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이 사진을 처음 본 AP통신의 괌 주재원 존 보드킨은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남을 한 컷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사진이 미국의 각 신문사에 배포되자, 그 편집장들은 이 사진을 일제히 225일자 조간 신문의 제1면에 대문짝만한 크기로 게재했다. 물론 접혀서 가판대에 꽃힌 상태에서도 잘 보이게끔 세심히 지면구성을 하는 정성까지 들여가면서.

 

평범한 해군 수병에서 애국의 아이콘으로


이 사진은 순식간에 당시 미국 정계까지도 강타했다. 당시 플로리다 주 하원의원 조지프 헨드릭스는 이 사진의 모양을 본뜬 기념비를 세우자는 의안을 발표했다. 오레곤 주 하원의원 호머 앤젤은 이 사진을 가리켜 결코 굴복하지 않는 미국인의 혼을 상징하는 사진이라고 찬양했다. 그리고 316, <시카고 헤럴드 아메리칸> 지의 편집장 루이스 러플은 이 사진에 나온 해병대원들을 미 본토로 송환시켜 그해 5월에 시작될 예정이던 제7차 전쟁 공채 판매 운동의 홍보요원으로 투입하자는 의견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대통령은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군이 전사 6,821, 부상자 19,217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이오지마 전투의 와중에서 로젠탈의 사진 속 6명 중 3(마이클 스트랭크, 하론 블록, 프랭클린 수슬리)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존 브래들리, 레니 개그논, 아이라 헤이즈 세 사람만이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이 중 존 브래들리는 312일 부상을 입어, 이미 전투지역 밖으로 의무후송된 상태였다.

이렇게 존 브래들리의 이오지마 전투는 끝이 났다. 이후 미군은 섬에 있던 일본군을 사실상 몰살시키고 D+35일인 326일 이오지마 전토를 점령했다. 그는 D+2일이던 221일에 일본군의 맹공격 속에서도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해낸 공로로, 미 해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인 해군 십자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하지만 미 본국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새로운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제7차 전쟁 공채 판매 운동이라는 전투였다.

19455, 독일이 패망한 이후 이제 남은 추축국은 일본 뿐이었다. 일본 본토에 지상군을 상륙시켜 결전을 벌이려면(당시 1급 비밀의 첨단무기였던 원자탄의 실험은 그 해 7월에야 성공했다) 엄청나게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로젠탈의 감동적인 국기 게양 이미지를 제7차 전쟁 공채 판매 운동, 별칭 <마이티 세븐스(Mighty 7th)>의 상징물로 활용, 전쟁 공채를 팔아 계전(繼戰)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충당하고자 했다. 로젠탈의 사진은 <마이티 세븐스>의 포스터가 되었다. 로젠탈의 사진을 가지고 만든 기념우표도 발매되었다. 거기에 세 국기게양자까지 판매 운동 현장에 나와 준다면, 이는 공채 판매에 실로 화룡정점을 찍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는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예측은 정확했다. <마이티 세븐스>의 목표 금액은 140억 달러(이하 모두 당시 화폐가치). 그러나 19457월까지 8주간 미 전국을 돌며 진행된 <마이티 세븐스>에서 미국 국민들은 무려 263억 달러어치의 전쟁 공채를 사주었다. 이는 이듬해인 1946년의 미 정부 예산 규모인 560억 달러의 약 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존 브래들리는 그해 11월 해군에서 제대한 후, 고향으로 가서 자신을 기다려 주었던 애인 베티 반 고프에게 청혼, 이듬해 55일에 식을 올렸다. 그는 이후 아내와의 사이에서 여덟 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는 결코 국기게양자, 해군십자훈장 수훈자로서의 자신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입대 전에 했던 일인 장의업에만 매진했다. 그는 부지런히 일했고, 불과 30세에 고향의 대형 장의사인 <맥켄들레스 앤 조벨> 장의사를 인수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지만, 이오지마 섬에서의 국기 게양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으려 했다.

 

끝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던 이오지마의 망령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존 브래들리는 죽을 때까지 이오지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이오지마 전투를 상당히 허구적으로 묘사한 1949년작 영화 <유황도의 모래(Sands of Iwo Jima, 앨런 드원 감독, 존 웨인 주연)>에 레니 개그넌, 아이라 헤이즈 등과 함께 해병대의 압력으로 억지 출연해 또 성조기를 세워야 했다. 실제 국기 게양자들을 내세워 영화의 흥행은 물론 해병대의 이미지 개선을 원한 영화사와 해병대에 굴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존 브래들리의 모습은 거대한 동상으로도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다. 지난 1954년 알링턴 국립묘지에 로젠탈의 사진을 그대로 입체화한 미 해병대 전투기념비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100톤이 넘는 무게의 이 기념비는 아마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존 브래들리를 괴롭힌 것은 다름아닌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였다. 그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자신의 가장 친한 전우였던 랠프 이그나토우스키가 일본군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사망한 모습의 시체를 목격했다. 그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었다. 존 브래들리는 결혼 후에도 밤마다 남몰래 흐느끼고, 괴로워해야 했다. 심지어 일본에 유학 중이던 그의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가 일본에 여행을 오라고 권하자, 그는 격하게 거부했다. 친구를 그렇게 고문하고 죽인 놈들의 나라에는 가기 싫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다른 두 국기 게양자들도 평생 동안 이오지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라 헤이즈는 술로 시름을 달래다가, 1955년에 32세의 젊은 나이에 거리에서 죽었다. 레니 개그논은 국기게양자로서의 명성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는 내심 기대가 컸던 아내에게 구박만 당하고, 별로 좋지 못한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았다. 그러던 1979, 그는 자신이 관리하던 건물 보일러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맨체스터의 묘지에 묻혔으나, 미망인의 극성스런 탄원 탓에 1981년 알링턴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존 브래들리는 레니 개그논이 죽은 이후 15년 동안, ‘마지막 남은 국기게양자로서 살아가다가, 지난 199411170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의 묘는 고향인 위스콘신 주 안티고의 평화의 여왕 묘지에 있다.



이 모든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데에는, 지난 2000년 존 브래들리의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가 여섯 명의 국기 게양자들의 일생에 대해 쓴 책 <아버지의 깃발(Flags of Our Fathers)>이 큰 공헌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언론의 선정주의, 그리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영웅이 필요했던 당시 상황이 진실을 왜곡하고 국기 게양자들의 일생을 망가뜨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 의해 2006년 영화화되기도 했다.

 

매스미디어의 저주


사진 한 장 때문에 이렇게 휘둘린 존 브래들리의 이러한 운명은 언론, 더 나아가서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어차피 대중은 모든 사건 현장에 직접 가서 진실을 체험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언론은 대중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창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진실을 체험할 수 없음이 언론이 있기 위한 전제라면, ‘진실을 보여주는 창문대신 진실과 구별하기 힘들게 생긴 사진 액자를 걸어 놓아도 우리의 멍청한 두뇌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언론이 불신을 받는 근원적인 이유라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희망과 진실을 혼동하는 경향이 강한 생물이다. 아무리 언론이 진실을 보여줘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그들에게 그 메시지는 진실이 아니다. 반면 언론이 허구를 보여줘도 사람들이 믿으면 그들에게 그 메시지는 진실이 된다. 이처럼 외부 자극의 진실성을 분간하는 능력이 떨어지기에 인간의 두뇌는 잘못된 결론을 뽑아내고, 이를 수정치 못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언론은 정론직필을 통해 인간들의 옳은 판단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 즉 결함덩어리인 존재들인데다가, 그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치 않게 들릴만큼 우리의 언론은 이미 너무나도 혼탁해져 버렸다. 존 브래들리의 일생은 한 사람의 언론인인 기자에게 언론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 얼마만큼 진실에 접근해야 하는 것인지, 한 사람의 인생에 어디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새삼스레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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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 539기 김복철(44)씨. 그는 지난 1986년부터 88년까지 서해 바다의 강화도에서 근무했다. 오랜만에 군대 얘기가 나오자 여느 해병대 나온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경험담을 쏟아내더니 신병교육을 마치고 동기들과 찍은 사진...

  • 장수만 방위사업청장 사의 표명장수만 방위사업청장 사의 표명

    2011. 02. 17

    ‘함바집 비리’ 관련 검찰 조사 앞두고 방사청 인트라넷에 글 올려 16일 오전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한 장수만 방위사업청장이 이날 오후 방사청 인트라넷 게시판에 ‘방사청을  떠나면서’란 글을 올려 “더 이상 저 때문에 우리 방사청이 현...

  • 위안부 할머니 장례도움 약속한 태양상조 김종연 대표위안부 할머니 장례도움 약속한 태양상조 김종연 대표

    2011. 01. 18

    [이사람] “아프셨던 만큼, 가시는 길 편히 모실게요” 정대협과 ‘장례행사 후원’ 협약마지막 한명까지 용품 등 지원  “건강하게 오래오래, 일본 정부가 사죄할 때까지 사시고, 나중에 세상 떠나시는 날에는 우리 어머니보다 훨씬 잘 모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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