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핵실험 마친 북한 핵-최소억제 전략에서 제한 억제 전략으로
4차 핵실험에 대한 평가: 수소탄 실험 둘러싼 논란
북한은 6일 낮 12시30분(평양시간 낮 12시) <중앙텔레비전>의 특별 중대 보도를 통해 첫 수소탄(수소폭탄)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 방송은 “조선노동당의 전략적 결심에 따라 주체105(2016)년 1월6일 10시 주체조선의 첫 수소탄 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며 “우리의 지혜, 우리의 기술, 우리의 힘에 100% 의거한 이번 시험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개발된 시험용 수소탄의 기술적 제원들이 정확하다는 것을 완전히 확증하였으며 소형화된 수소탄의 위력을 과학적으로 해명했다”고 밝혔다.
한미의 이에 대한 공식평가는 수폭 실험인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며, 실험은 실패했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 보수성향 매체인 워싱턴 <프리비컨>이 미 정부 당국자들의 발언을 인용해 1월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은 북의 4차 핵실험을 분석한 결과 수폭 요소가 포함된 소형 폭발로 결론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매체는 군사전문 언론인인 빌 거츠가 ‘북한이 부분적 수소탄 실험을 했다’는 제목으로 작성한 기사에서 이번 실험의 폭발력이 일반적인 2단계 수소탄보다 훨씬 작은 5∼7kt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국이 대기 중에서 헬륨과 리튬을 검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 이런 물질을 확보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핵융합실험인 수소폭탄 또는 그전 단계인 증폭핵분열탄 실험의 경우 방사성 제논 대신 삼중수소가 결합한 헬륨이 검출된다.
북한이 수소폭탄 제조에 쓰이는 방사성 물질을 확보하고 이를 기존 핵무기의 폭발력을 늘리는데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 일찍부터 미국 핵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프리 루이스 미국 비확산센터(CNS) 소장은 지난해 12월10일(현지시간)“북한이 (수소폭탄 개발에 쓰이는) 중수소나 리튬6와 같은 물질을 이용해 기존 핵무기의 폭발력을 증강시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루이스 소장은 “북한이 기본적인 핵실험을 영원히 계속할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북한 전문 웹사이트인 <38노스>를 운영하는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학 방문연구원도 “수소폭탄 제조에 쓰이는 물질을 기존 핵폭탄의 폭발력을 늘리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위트 연구원은 “북한은 오래전부터 수소폭탄과 관련된 핵물질을 다루는 데 쓰이는 시설을 영변 핵시설 내에 건설해왔다”며 “북한은 그러나 단기간 내에 수소폭탄을 만들기보다는 기존 핵물질의 폭발력을 강화하는 데 쓰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위트 연구원은 “북한은 2010년에 기존 핵폭탄 프로그램에 핵융합 연구를 통합시켰다고 주장했다”며 “다시 말해 수소폭탄을 만들 능력이 있다는 주장이었다”고 전했다.
이번 핵실험은 2014년 3월 말 “핵 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약 2년만이며, 2010년 5월 핵융합 반응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후 5년 8개월이 흐른 시점이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1월 7일 “지난 2006년 10월, 2009년 5월, 2013년 2월 핵 실험은 ‘핵분열에 의해 발생하는 에너지를 이용한 원자탄의 시험’인 반면, 이번 시험은 핵융합기술에 기초한 것으로 탄두의 소형화, 경량화도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2010년 5월 12일 <노동신문>이 “조선의 과학자들이 제기되는 수많은 기술적 문제들을 100%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여 핵융합반응을 성공시키는 자랑찬 성과를 이룩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고 전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이춘근 박사는 북한이 원자탄 폭발시의 고온 고압으로 리튬 6(Li6)와 중수소를 반응시켜 삼중수소를 발생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중수소-삼중수소(D-T) 핵융합을 일으키는 강화형 핵무기의 개발을 진행시켜왔다고 밝혔다. 이 박사에 따르면 강화형 핵무기 개발 시험은 핵폭발 없이도 실험실에서 수행할 수 있는데. 레이저 핵융합 설비를 이용해 고온 고압 플라즈마를 만들고, 이를 반사 거울로 작은 점에 집중시켜 순간적으로 수천만도의 고온고압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1980년대 중국과학원과 북한과학원의 과학기술협력을 통해 중국이 사용하던 레이저 핵융합 설비가 북한에 공여됐으며 북한은 이를 평성에 있는 과학원 산하의 이과대학에 설치하고, 용량을 확장하여 실험 조건을 강화하였다고 말했다. 앞서 2010년 5월 12일 <노동신문>이 보도한 핵융합 실험 성공은 이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진파 측정에 의한 핵폭발 규모로 수소폭탄이 아니라든가, 수소폭탄 실험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인 평가로 볼 수 없다. 미국의 네바다나, 소련의 세미팔라친스크, 중국의 고비사막과 같이 인구밀접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광활한 사막이 없는 북한의 지리적 여건상 수폭을 실험한다고 해도 그 폭발력을 과시할 수 있는 규모의 실험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과거 미국처럼 태평양의 비키니섬과 같은 장소를 확보하지 않는 한 북한은 수폭의 폭발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은 할 수 없으며, 수폭을 개발한다해도 제대로 된 실험은 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수소탄이든 증폭 핵분열탄이든 이번 핵실험을 통해 북한이 플루토늄탄과 우라늄탄 실험에 이어, 수소탄 개발이라는 일반적인 핵 개발 수순을 밟고 있으며, 핵탄두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기술에서 상당 수준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 들어서 이미 북한은 2009년 5월과 2013년 2월 그리고 이번 까지 핵실험을 세 차례나 더 실시했고 2012년 12월엔 지구궤도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도 성공했다. 이로써 북한은 세계 8번째의 핵실험 국가이자, 세계 10번째로 자국 영토에서 자국 로켓으로 자국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쏘아올린 ‘스페이스 클럽’ 회원국이 되었다. 그리고 3차 핵실험에서는 우라늄 농축탄을 통해 소형화에 성공했으며, 4차 핵실험으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 이후 10년 만에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 실험에 나선 셈이 된다. 또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면 세계에서 6번째 수소폭탄 보유국이 된다. 지구상에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 등 5개국뿐이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이 현저히 높아진 것이다.
핵교리 및 핵미사일 지휘통제체제 완성
신형 300mm 방사포
핵실험과 로켓발사 등을 통해 핵폭탄과 미사일 등 운반수단을 개발하고 보유한 것만으로 핵무기 보유국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핵분열 물질의 생산과 운반수단의 보유 외에도 핵 교리와 핵미사일 지휘통제체제를 구축해야 명실상부한 핵무기 보유국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이번 4차 핵실험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의 로켓발사를 진행하면서 이런 조건을 갖추려는 움직임을 착착 진행시켜 왔다. 2012년 4월 13일 개정헌법의 ‘핵보유국’ 명시, 2013년 3월 31일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경제 건설과 핵무력 병진노선’ 채택, 2013년 4월 1일 최고인민회의에서의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 라는 법의 제정 그리고 2014년 4월엔 ‘조선인민군 전략군 사령부’의 창설을 공표했다. 핵 교리와 함께 핵 미사일 지휘통제체제를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 공고화 법’에서 △핵무기 보유의 목적 △핵무기의 용도 △핵억제력의 질적·양적 강화 △최고사령관에 의한 핵무기 사용 △비핵국가에 대한 핵무기 사용금지 △핵무기 보유 및 실험의 안정성 보장, △핵무기 기술·물질의 불법적 유출방지 △국제적 비확산 노력 동참 △국제적 핵군축 지지 △법령 집행을 위한 실무대책 수립 등 10가지의 핵 교리를 발표하였다. “핵억지력과 핵보복타격력을 질량적으로 강화”(제3항)할 것과 핵무기를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될 때까지”(제2항) 보유할 것임을 명기함으로써 핵무기를 통한 억제력, 공격력, 보복력을 명시하는 한편 사실상의 영구 보유 의사를 선언한 것이다. 또한 2013년 6월에는 39년 만에 수정된 북한 통치의 핵심 강령인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원칙 서문에 “핵 무력을 중추로 하는 군사력과 튼튼한 자립경제를 갖추게 됐다”고 명기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은 2014년 들어선 전략군 사령부 창설에 맞춰 단거리 미사일과 장사정포 등을 거듭 발사했다. 2014년의 경우 2월21일부터 9월6일까지 발사한 미사일은 사거리가 500km에 이르는 신형전술미사일, 300mm 신형 방사포와 스커드 및 로동 미사일, 프로그 로켓, 신형 전술 미사일 등 19차례에 걸쳐 중단거리를 망라해 111발에 이른다. 이는 2013년 대비 10배 이상으로 증가한 수치였다. 또한 주로 강원도 원산 지역에서 미사일 발사 시험을 했던 북한은 평북(묘향산)과 황해도 평산, 개성 등 내륙 지역으로까지 발사 지점을 확대했으며 북중 접경지역인 자강도 지역에서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스커드 미사일
또 2014년 6월엔 5년만에 스커드미사일 발사 재개 및 신형 전술유도무기 시험 발사를 진행한 바 있다. 2014~2015년 미사일 발사 횟수가 최근 6년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한 부분은 전략군 확대·개편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전략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미사일 발사는 북한이 생존성을 확보하면서 제2격 능력(2nd strike capability)을 갖추기 위한 핵미사일 지휘체제 구축을 점검, 운용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됐다.
정부쪽 정보소식통들은 전략군 창설의 의미를 모든 미사일 전력을 통합, 발사체계를 자동화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발사 명령을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는 체제로 개편하려는 것으로 봤다. 한 정보 소식통은 “전략군을 창설한 것은 미사일 발사체계를 자동화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시킨 의미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소식통은“기존 전략로켓군 예하에는 스커드·로동·무수단 미사일 여단이 각각 편제되어 있었지만 전략군을 창설하면서 이들 여단이 모두 통합된 것으로 안다”면서 “김정은 제1국방 위원장이 미사일 전력에 대한 ‘최고 주도권’을 갖게 됐고 그만큼 발사 명령에 대한 반응 속도도 높아지게 됐다”고 분석했다.
소련은 첫 핵실험을 한 지 10년 만에 전략로켓군을 창설했고, 후발 핵 국가인 중국은 첫 핵실험을 한 지 2년 만에 제2포병을 창설했다. 북한은 첫 핵실험을 한 뒤 16년만인 2012년 전략로켓군을 창설했지만 이 두나라의 핵무기 전력화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소련과 중국은 핵탄두의 장거리 타격능력을 갖추는 이른바 ‘최소 억제전략’을 갖추는 단계에서 전략로켓군과 제2포병을 창설했다. 소련의 경우, 핵미사일이 광범위하게 도입된 195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형태의 군종 및 병과를 신설하면서 1959년 전략로켓군을 창설했다. 중국은 1956년 전략미사일 개발, 1964년 핵실험 성공 이후 1966년 7월 ‘제2포병부대’를 공식적으로 창설한 바 있다.
이처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는데 소련과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한 뒤에 전략로켓군을 창설했다면, 중국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기 이전에 제2포병을 창설했다. 소련과 중국의 전략로켓 부대는 육군, 해군, 공군 외 별도의 군으로 취급되고 국가지도부가 직접 통제하고 관할한다. 북한의 전략군은 부대 명칭과 창설시기 등의 면에서 본다면 소련 전략 로켓군과 더욱 유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핵무기의 소형화 탄두화 여부에 대한 미국의 유보적인 평가와 별개로 이런 움직임으로 볼 때 북한 스스로 핵무기 보유 수준에서 ‘최소 억제전략’을 갖췄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이 최소 억제전략 수준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기술을 입증해야 한다. 우선 북한은 장거리 타격 능력의 핵심능력인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은 여러 차례의 인공위성 로켓 및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거쳐 2012년 12월 마침내 대기권 밖에 인공위성 광명성 3호 2호기를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시켰다. 그러나 이 로켓이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기능하려면 대기권으로 재진입시키는데 성공해야 한다. 북한은 아직 이 기술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기권 재진입기술은 이미 50~6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기에, 북한이 이 기술을 확보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2014년 1월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장(DNI)은 미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확장하고 플루토늄 원자로를 재가동했다고 밝히고, KN-08(북한은 화성 13호로 명명)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배치를 위한 초기조치로 평가한다고 증언하였다. 2015년 12월 퇴임한 새뮤엘 라클리어 미 태평양사령관(당시)도 언론인터뷰에서 북한이 미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있고 위협할 수 있는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실전배치 수순을 밟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2014년10월 27일 열린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세 차례의 핵실험을 했고 그 이후에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 북한이 스스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발표할만큼 기술적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제46차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 참석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도 2014년 10월 24일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 일반적으로 탄두중량 1천kg, 직경 90cm 이내로 핵폭탄을 만들 경우, 이를 소형화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 정도 무게와 크기의 탄두는 북한의 스커드-B형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으며, 이 미사일은 사거리가 300여km이기 때문에 남측 영토의 대부분이 사정권에 들어가게 된다.
지난해 말 대장으로 승진한 김락겸 전략군 사령관
전략군의 실체와 핵무기 고도화에 따른 전략전술의 변화
북한은 이처럼 핵무기의 고도화 단계에 따라 전통적인 군종, 병종 간 체계를 재편성해왔다. 아울러 기존의 육군·해군·항공 및 반항공군 등과 함께 제4군종으로 추가된 전략군 등 이들 군종 사이를 보다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새로운 전략·전술(혼종적 작전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는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군단 6개를 감축하고 전방 배치 전력을 3단계에서 2단계 타격체제로 통합하고 경보병부대를 증강하면서 공세적인 기동전력 위주로 재편하였던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전략군의 실체를 공식적으로 드러낸 것은 2012년 3월 김정은의 ‘조선인민군 전략 로케트 사령부’ 시찰 소식부터였다. 이 전략로케트 사령부는 기존의 미사일지도국을 확대·개편한 것이었다. 2012년 전략로켓군이 창설되기 이전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운용하는 부대는 ‘미사일지도국’이었다. 북한은 1980년대 후반부터 스커드 미사일(사거리 500㎞)을, 1990년대부터는 노동 미사일(사거리 1,300㎞)을 실전 배치했다. 2004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2003년 미사일부대 지휘체계 일원화를 위해 이 포병군단을 미사일지도국으로 개편했다.
그 뒤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2012년 4월 15일의 대규모 열병식에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첫 대중연설을 통해 육성으로 ‘전략로켓군’을 직접 호명하는 형식을 밟았다. 매년 성대하게 행사를 치르는 태양절(김일성 생일)이지만 이날은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지 반년이 지나지 않았고, 김일성 주석 탄생일인 태양절 100주기였기에 수십만의 평양 시민과 인민군이 참가한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김 제1비서는 “영용한(영웅스럽고 용감한) 육·해·공군 및 로켓 전략군”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제4의 군대’, 북한의 새로운 군종인 전략로켓군의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다. 그리고 이어진 군사 열병식에서는 미 정보기관이 KN-08로 명명한 5000km 이상의 장거리탄도미사일 (북은 화성13호 로켓,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급) 6기와 이동식 발사대(TEL·Transporter Erector launcher)를 선보였다.
이어 2014년 5월 29일 북한매체들은 김 제1위원장의 전술 로켓 발사훈련 지도 소식을 전하면서 ‘전략군’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여 새로운 군종의 탄생을 알린 바 있다. ‘전략로케트사령부’ → ‘전략로켓군’ → ‘전략군’의 명칭 변경을 통해 제4군종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에 맞춰 사령관 계급도 소장(별 1개)에서 중장(별 3개)으로 격을 올렸으며, 지난해 말에는 다시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에 따라 미사일지도국의 국장이었던 김락겸은 2012년 4월11일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장 계급으로는 유일하게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됐다.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조선노동당의 주요 군 통치기구로, 인민무력부장 등 육·해·공군 사령관 17명이 위원으로 있다. 김락겸 중장은 전략군으로 개편되는 2014년에는 한단계 높은 상장(우리의 중장 계급, 2월)으로 승진했으며, 2015년 12월 또 다시 1년만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북한 중앙텔레비전은 지난해 12월4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제7차 군사교육 일꾼대회 참석 기록영화에서 김 사령관(붉은 원)이 별 4개가 달린 대장 견장을 달고 나온 모습을 방영했다.
‘전략군’의 신설 및 체계화는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미사일부대를 통합하여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를 통해 다종화된 타격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위력한 지상·공중·수중의 전략적 타격수단을 기둥으로 자위적인 핵억제력을 비상히 빠른 속도로 더욱더 완벽하게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미 국방부가 2013년 의회에 제출한 ‘북한 군사력 증강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탄도미사일용 이동식발사대를 최대 200여대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동식 탄도발사차량(TEL)의 전략적 활용도는 뛰어나다. 다량의 차량을 24시간 운행하다가 불시에 로켓을 발사시킬 수 있어 조기에 발사 여부를 포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새롭게 명명된 북한의 전략군이 현재 이런 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고 있으나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발사대 실전배치를 목표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북한은 모든 핵무기 국가가 핵무기로 전쟁억지력을 갖추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이른바 ‘최소 억제전략’을 완전히 구사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은 장거리 타격 능력의 핵심능력인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은 여러 차례의 인공위성 로켓 및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거쳐 2012년 12월 마침내 대기권 밖에 인공위성 광명성3호 2호기를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시켰다. 그러나 이 로켓이 대륙간탄도미사일로 기능하려면 대기권으로 재진입시키는 데 성공해야 한다. 북한은 아직 이 기술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기권 재진입기술은 이미 50~6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기에, 북한이 이 기술을 확보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이동식 발사대를 갖추게 된다면 북한이 추진할 다음 단계는 ‘제한 억제전략’ 수준의 핵전력 확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 개발, 다탄두 각개 목표설정 재돌입 비행체(MIRV·Multiple Independently-target able Reentry Vehicle) 전력화 등이 과제다. 북한은 이런 예상과 전망처럼 2015년 들어서 SLBM 사출 실험을 5월과 11월, 12월 세번에 걸쳐 실시했다. 소련과 중국이 전략로켓군과 제2포병을 창설한 이후 했던 것과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0㎿ 규모(열출력) 경수로 올해 본격가동 가능성
돔모양의 건물이 실험용 경수로 (EWLR)(사진 위) 출처: 38north 아래사진은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
북한의 핵무장력은 새로운 형태의 핵실험에 의해 확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우라늄 플루토늄 등 핵분열 물질을 증가시키고 있다. 앞서 영변의 실험용 경수로(ELWR) 건설 현장을 위성으로 분석해 온 <38노스>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몇년간의 공정을 거쳐 이제 실험용 경수로 가동을 위한 마지막 준비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38노스>는 2015년 5월24일 촬영한 상업용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북한이 경수로 시설 인근에 전력생산을 위한 전기변압기와 배전시설을 지원하는 데 쓰일 것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38노스>의 닉 핸슨과 제프리 루이스가 앞서 2013년 당시 예측한 것에 비하면 경수로 가동은 다소 늦어지고 있다. 당시 이들은 북한이 이르면 2014년부터 100㎿t(전기출력용량으로는 25~30MWe) 경수로를 시험가동하기 시작해 2015년에는 상업운전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따라서 2016년에는 이 경수로가 가동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2013년 5월3일 ‘우리 당의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은 항구적 노선이다’라는 논설을 통해 “당의 병진노선이 주체적인 원자력공업에 의거하여 핵무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긴장한 전력 문제도 풀어나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해 이 경수로가 병진노선의 핵심임을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 구조물이 완공되면 열출력 100MW급 규모의 경수로와 전력선으로 연결해 35MW 규모의 전력생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 북한의 흑연감속로가 5MW급인데다 전기생산용으로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경수로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경수로 가동은 북한이 소규모지만 원전기술을 확보했다는 걸 의미한다. 북한은 이 경수로를 내세워 평화적이고 경제적인 전력생산을 위한 저농축 우라늄을 정당화할 것이고, 농축우라늄의 핵무기화는 물론이고 이 경수로가 만들어내는 다량의 플루토늄은 핵무기 제조용으로 전용할 수가 있다.
찰스 퍼거슨 미국 과학자협회(FAS) 회장은 이미 2014년 7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실험용 경수로가 완공되면 북한은 매년 30∼40㎏의 플루토늄을 생산해 5∼6개의 핵폭탄을 만들 능력을 추가로 확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양탄일성’과 인민해방군 제2포병
중국이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과정은 ‘양탄일성(兩彈一星)’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양탄’은 바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말하는 것이고 ‘일성’은 그것을 미사일에 실어 발사할 수 있는 기술력인 인공위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북한의 이번 핵무기 개발은 이 양탄일성의 단계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어찌보면 후발 핵무기 개발국으로서 중국의 핵개발 논리와 명분은 북한과 서로 비슷한 측면이 많다.
중국은 1962년부터 핵무기 개발에 나서 2년 만인 1964년 고비사막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4년 10월 16일,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불과 2년 8개월 만인 1967년 6월 17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1970년 4월에는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양탄일성’을 완성하였다. 소련은 첫 핵실험 뒤 수소폭탄 실험까지 4년이 걸렸다. 영국은 5년, 프랑스는 8년이 지나서야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를 고려하면 북한이 수폭 개발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 10대 원수의 한 명인 니에룽전의 총 지휘 하에 덩자센, 저우광자오(周光召), 황쭈차(黃祖洽), 위민(于敏) 등이 수소폭탄 이론을 완성하고 원리실험을 거쳐 결국 수소폭탄 실험까지 일련의 개발 임무를 완수했다. 1967년 6월17일 실험에 성공한 중국 수소폭탄은 TNT 약 330만톤 위력에 달했으며 운송수단에 탑재가 가능해 실전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수소폭탄 실험 성공 후 공식 논평에서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방어와 전쟁억제력을 위한 제한적인 핵개발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핵을 사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천명하였다. 북한도 시기에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내용의 발표를 하고 있다.
중국이 핵개발에 나선 배경은 한국전쟁과 중소분쟁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맥아더가 제안한 핵무기 공격의 목표물이 되기도 했었다. 이에 따라 내부적으로 1949년 소련의 핵보유로 핵독점이 깨진 상황에서 미국이 섣불리 핵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잠정결론을 내리고 있었으나 핵공격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자각을 하게됐다. 또한 1959년 중소분쟁으로 우방국이었던 소련으로부터의 핵공격 위협에도 직면하게 됐다. 베이징 지하에 방공호를 파며 마오쩌둥(毛澤東)은 ‘공포의 평형’을 위해 핵개발에 매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됐다는 것이다.
1956년 10월 중국은 소련과 국방신기술협정을 체결하여 핵무기와 관련한 기술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한 물리학자 덩자센(鄧稼先)이 귀국하고 1958년 정식으로 핵연구소가 설립되며 핵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59년 6월 소련과의 갈등으로 소련과 맺은 기술협정은 파기되고 233명의 소련기술자들이 모두 철수하였다. 소련 연구원들이 철수하자 중국은 ‘596프로젝트’를 세워 자국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핵연구에 나섰다. 소련의 지원이 끊긴 59년 6월을 기념한 이 프로젝트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중국은 강해질 수 있다는, 중국의 자존심을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1964년부터 1988년까지 중국은 30여 차례 핵실험을 실시하며 핵무기의 선진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인들은 핵무기 개발이 중국에 상존하던 전쟁 위협을 억제하고 패배감에 젖어 있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1970년대 후반부터 개혁 개방으로 빠른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것도 국방 분야의 안정된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논리 또한 이런 중국의 논리와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다.
미사일 개발은 1955년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라 불리는 첸쉐썬(錢學森) 박사 등 미국에서 연구활동을 하던 100여 명의 중국 과학자들이 귀국하면서 시작됐다. 중국은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략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57년에 전략미사일을 위한 연구소와 훈련 및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소련이 전략 로켓군을 창설한 1959년에야 처음으로 지대지 미사일 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7년 뒤인 1966년 7월 제2포병을 공식 창설했다. 제2포병이라는 명칭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국제 정세를 고려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제2포병은 창설하자마자 기술, 인력 등의 부족으로 비정규군의 형태를 유지하다 1978년 5월 덩샤오핑이 전략미사일부대를 전략적으로 육성하면서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던 제2포병은 1984년 10월 1일 건국 35주년 기념 군사행렬에서 ‘둥펑(東風)’ 미사일을 앞세우고 톈안먼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1985년 6월이 돼서야 제2포병은 지휘·통제·자동화 지휘계통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며 전략 핵 반격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 중앙군사위원회의 직속기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제2포병은 한국군 합동참모본부에 비견되는 총참모부와 나란히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는다. 전국에 6개 사단(기지) 사령부가 있고, 각 사단은 3개 여단으로, 1개 여단은 4개의 발사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여단에는 둥펑 계열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 둥펑 계열 미사일은 중국 자체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중국의 신형 미사일 둥펑 31A
시진핑의 중국 군 편제 개편 및 대대적 개혁
시진핑(習近平) 정부는 2015년 들어 육군 중심의 중국군 편제를 대폭 개편하는 군개혁 방침을 천명했으며, 항일전쟁 70주년 기념 행사에서는 30만명 규모의 감군과 군의 현대화를 천명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016년 1월1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대규모 군 개혁 일환으로 로켓군(火箭軍)과 육군 지휘기구(領導機構 사령부), 전략지원부대를 창설했다고 2016년 1월 1일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시진핑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이 전날 베이징 바이(八一) 대루에서 열린 이들 3개 신설 기구의 창설대회에 참석해 각 사령원에 임명장과 군기를 수여했다. 시 주석은 “육군 지휘기구, 로켓군, 전략지원부대 창설이 당 중앙과 중앙군사위가 중국 꿈과 강군 꿈의 실현을 위해 행한 중대 의사결정으로 군 현대화 건설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라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작년 3월 선언한 공산중국 수립 후 최대 규모 군 개혁 추진이 이들 기구 출범으로 본격 시동했다. 중국군은 종전 육군 중심의 종적 조직으로 돼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육군 사령부가 따로 없었다. 이번 군 개혁은 육해공과 로켓군을 통합 지휘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게 핵심이다. 남중국해 등에서 해양에서의 갈등에 대응해 시진핑 지도부가 해군, 공군을 강화하고 육군 사령부를 신설함으로써 육해공과 로켓군을 대등한 위치로 만들어 전통적인 육군 주도 지휘계통을 바꾸려는 것이다 육군 사령원에는 리쭤청(李作成) 청두군구 사령원, 로켓군 사령원은 웨이펑허(魏鳳和) 제2포병 사령원, 전략지원부대 사령원엔 가오진(高津) 군사과학원장이 각각 취임했다.
강태호 선임기자 kank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