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분단 대담, "차이를 인정하되, 절대화하지 말아야"
올해는 해방과 분단 70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학계에서도 분단과 통일 문제를 짚어보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 동국대 분단/탈분단센터가 지난 3월 31일 기획한 학술대담 ‘분단은 어떻게 수행되는가’는 분단을 비판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안보‧민족‧통일이라는 개념을 재검토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분단은 민족과 조국이 단순히 양분되어 있는 하나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통일논의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안보‧민족‧통일이라는 세 개념이 역설적으로 분단을 재생산하는 핵심 개념이 되고 있다. 자연히 분단의 극복은 통일이라는 상태의 실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분단의 수행성’을 해체하는 탈분단의 과정이 곧 분단의 극복이다. 박순성 동국대 교수(북한학과, 동국대 분단/탈분단연구센터장)의 사회로 진행된 박노자 오슬로대학교 교수,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의 대담을 정리했다.
박순성 교수(이하 사회)=먼저 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분단의 장치로서 안보, 민족, 통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북한은 ‘타자’일 뿐
홍민 연구위원(이하 홍)=안보‧민족‧통일은 한국 사회에서 신성불가침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언어적 차원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장치화되어 일상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의식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들 개념은 우리의 생각을 특정 맥락으로 유도하고 있다. 먼저 안보는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내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민족도 한민족이라고 말하는 논리 속에서 북한을 타자로 규정하려 하는 생각이 나타난다. 또한 통일을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통일이라는 말 속에서 남과 북이 서로를 부정하는 분단이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안보‧민족‧통일이라는 분단의 장치들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또 해체될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분단 앞에서는 인권이 없다
박노자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 교수(이하 박)=민족이라는 개념 속에서 분단과 적이라는 개념이 동시에 생겨난다. 같은 민족으로 상상된 공동체가 분단되었고, 적이자 타자인 북한이 존재하게 되었다. 같은 민족이 타자가 되었을 때 중립적 타자는 있을 수 없다. 한국 사회 내의 반북사상 속에서는 북한을 중립적으로 보기 어렵다. 여기에서 타자는 평화공존을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편적인 인권도 적용되기 힘들다. 몇 년 전 한 민간인이 비무장지대(DMZ)를 넘어가려다 사살됐다. 월북 민간인을 사살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처럼 분단의 절대성 속에서 보편적 인권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적이 된 민족은 비-인간이 되고 만다. 가족과의 재결합은 세계인권선언서에도 나오는 기본 인권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와 아들이 이산가족이 되었을 때 그들의 결합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들은 평양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다. 분단 앞에서는 인권이 없다. 한반도의 비정상성 속에서 분단의 절대성, 탈인권화가 수행된다.
식민지 경험국가의 ‘사회적 장벽’ 여전
구갑우 북한 대학원 대학교 교수
구갑우 교수(이하 구)=분단 상황에서 사회적 장벽(social partition)의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장벽은 과거에 행정적으로 단일했던 실체였지만 탈식민 시대에 들어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새로운 국가들로 분할되고, 새로운 개체들이 이전 국가와의 직접적인 연계를 주장하면서 형성된다. 분단과 사회적 장벽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식민지들의 분단 과정은 다르지만 보편적 시각에서 분단을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
안보‧민족‧통일은 ‘분단의 수행성’을 작동시키는 세 가지 장치일 수 있지만, 이들 담론 사이엔 구분이 필요하다. 안보는 적의 위협을 설정하고, 한반도의 두 국가성을 드러내는 개념이다. 반면 민족과 통일은 둘 다 하나를 호명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남한과 북한은 과거에 단일한 행정적 실체였기에 국가 대 국가인지, 혹은 특수관계로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분단이라는 틀 안에서 안보와 민족·통일은 각각 구분해서 봐야 한다.
사회=분단된 한반도에서 안보는 일반적인 국가들이 수행하는 안보와 다른가.
박=안보는 민족국가 내에서의 보편적 기능이긴 하지만, 한반도의 안보는 보편적 안보와 다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박정희 정권에서 말했던 총력안보의 특성이 나타난다.
사회=한반도 남북에서의 총력안보와 이스라엘의 총력안보는 비슷한 것 아닌가?
군대 다녀와야만 국민자격 얻는 대한민국
박=이스라엘의 총력안보는 이념적인 주입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가 안보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종교적 이유로 군대를 가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군대를 다녀와야만 국민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절대적이다.
구=이스라엘에서는 종교가 국가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 안보는 근대 국가가 들어서면서 국가의 생존을 위한 제1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이상이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은 영어로 National Security Act인데 국가 안보를 위해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회=분단 상황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안보와 테러에 대처하는 미국의 안보는 다른 것인가?
홍=작동하는 방식의 측면에서는 다를 수 있지만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특정한 것을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측면은 동일하다. 외부의 위협을 전제로 하면서 내부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자, 법의 자의성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안보의 특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분단 하에서 안보는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는가?
구=분단 이후 남북 양쪽이 모두 자립적인 개별 국가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통일과 민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해볼 만하다. 자립적 국가로서의 논리전개 과정에서 안보가 등장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일종의 이중사고이다. 서로 자립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하면서도 통일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불완전한 국가임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분단 상황 속에서 민족이란 무엇인가?
통일 논리 속에서 북한을 적대적 타자화
홍민 민족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홍=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감정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현실에서 우리는 북한을 적대적 타자로 바라본다. 박노자 교수가 말한 사례에서와 같이, 민간인을 사살하는 자의성이 용납되는 상황,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화되는 상황이다.
구=북한은 단군릉과 같은 민족적 유적지들을 끊임없이 발굴한다. 민족을 상상적 공동체가 아니라 역사와 뿌리를 갖는 유전학적 성질을 가진 실제적 공동체로 보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994년 이후 북한이 민족을 하나로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둘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이전의 동독이 사회주의 민족과 자본주의 민족이 따로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방식이다. 한반도에서 민족이 하나의 호명에서 둘의 호명으로 바뀌어가면서 민족담론이 상당히 변형된 형태로 움직이고,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사회=민족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족을 만들고, 민족은 하나의 상상적 담론에 불과한 것인가. 한반도에서 민족은 마치 각자의 국가단일성을 만들어가기 위한 담론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남한사회에서의 민족담론의 불온성
박=남북한의 민족담론이 어떤 유사성을 가지는지 살펴봤을 때 북한의 경우 국가담론과 민족담론이 비교적 잘 부합하는 느낌이다. 빨치산 투쟁을 통한 반제국주의 노선에서의 국가담론과 같은 민족인 남한을 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대남 정책은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의 주체사상에는 단재사학과 도산사상의 계승성이 일정 부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건국 과정에서 김구 중심의 우파세력이 배제되고 제국주의에 부역한 식민세력이 핵심이 되면서 민족 담론이 공식 담론이면서도 국가와 괴리를 보이는 불온한 담론이 되었다.
사회=북한이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현실에서 허구화된 억압 도구로 작동하는 건 아닌가. 남한에서도 민족이 역시 분단 상황에서 국가 억압의 장치로 작동한 것은 아닌가?
구=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다기보다 거꾸로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족주의는 자아와 타자를 만드는 대결적 과정이었다. 항일무장투쟁과 민생단 사건 등에서 얻은 김일성의 교훈은 사회주의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북한도 민족을 동원하여 경계짓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호1은 타자화된 북한과 ‘대결’ 임무 부여받아
홍=민족은 상상된 하나를 이야기하지만 남한은 그 안에서 하나의 민족이 되어야 할 북한을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있다. 우리는 ‘민족애적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슬픔은 상실한 것이 있고 울면 회복되지만, 우울증은 상실된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 우울한 상태인 것이다. 상대가 부정적 타자가 되면서 상실의 대상인지, 슬픔의 대상인지 알지 못하는 애매한 상태이다. 남한에서 우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내는 장치는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수행된다. 우리는 출생신고의 제도적 기입부터 남자는 1, 여자는 2로 기호화된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통해 안보를 수행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인지 판단받는다. 그리고 타자화된 북한과 대결하는 임무가 부여된다.
사회=민족애적 우울증은 후천적 분단인식결핍증후군으로 인한 병리학적 현상인가, 아니면 지배자가 만든 이데올로기 혹은 억압장치 때문에 발생한 스트레스증후군인가.
홍=남한사회에서 민족애적 우울증 사례는 확연하게 드러나진 않는 것 같다. 민족은 우리의 삶에서 상실된 무언가를 회복하겠다는 면에서 탈분단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반면에 민족 담론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규정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 충돌지점에서 민족애적 우울증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사회=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한반도의 분단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봐야 하나, 아니면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분단이 지속되고 있다고 봐야 하나.
남한과 북한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박=분단은 이산가족들처럼 같은 땅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던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다. 민족이라는 것은 국가가 만들어내는 측면이 크다. 장기분단의 결과로 민족이 양분되고 있다. 탈북자들은 방글라데시인들이나 파키스탄인들이 남한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게 살고 있다. 한국인보다 탈북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 언제까지 남한과 북한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민족은 가변적으로 볼 수 있다.
구=민족주의는 국가 대 국가(식민지 대 제국) 또는 민족 대 다른 민족 등의 이항대립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런 민족주의 담론의 부정성을 인정하면서 한 민족이 두 국가 체제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국가가 공존하는 평화체제를 탈분단의 한 형태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회:동국대 박순성 교수
사회=안보, 민족 담론에 의한 ‘분단의 수행성’을 살펴봤는데, 그럼 통일은 분단의 장치로서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가. 통일 대신 ‘탈분단’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민족이라는 개념도 낯설게 다가온다.
홍=분단은 정상적인 것인가 비정상적인 것인가. 통일과 분단은 항상 따라다니는 관계다. 통일은 정상성을 완성하지만, 분단은 상대적으로 비정상화된 상태이다. 통일은 절대화된다. 그래서 지금의 상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잘못된 개입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탈분단’을 제안한다. ‘탈분단’은 제도적, 정치적 문제에 집중된 통일보다는 분단의 극복에 있어서 한 단계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차이를 인정하되, 절대화하지 않는 ‘탈분단’
박=이전에는 분단이 폭력성을 지닌 말이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통일이 오히려 부정성과 폭력성을 띤다. 통일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것이, 최근 2~30년간 성공적인 통일 사례가 없었다. 또한 통일의 부작용도 많이 보인다. 통독의 사례에서 보듯, 통일은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삶을 바꾸는 것이 통일이 가진 폭력성일 수 있다. 지금의 남북한은 동서독보다 몇 백배의 경제적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한 통일을 실현할 때 발생하는 주민들의 재앙을 고려해야 한다. 이때 평화를 우선시하는 조금 더 느슨한 형태의 ‘탈분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남북한의 통일 담론은 서로 한쪽이 한쪽을 흡수하는 열망의 역사였다. 통일 담론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권력 문제이다. 권력은 결코 분할할 수 없기 때문에, 한쪽이 한쪽을 흡수하는 형식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야기하는 부정적인 효과 때문에 ‘탈분단’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차이를 인정하되, 차이를 절대화하지 않는 ‘탈분단’, 하나로 나아가되 완전한 하나로 합치되지 않는 ‘탈분단’, 이제 ‘탈분단’은 단순한 담론에서 벗어나 제도적‧장치적 설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 대담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9호] 2015년 0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3
정리‧장성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학생 기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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