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 회담이 동아시아 안보협력기구의 시초다

이규정 2015.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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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일 동맹을 넘어 중국까지 포함하는 지역 안보협력 내지는 안보 공동체를 상상하는 건 불순한가? 동아시아는 가시화되지 않았으나 영토분쟁의 지점은 동으로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제도)부터 댜오위댜오(일본명 센카쿠)까지 펼쳐져 있다. 거기에 오는 10월 조선노동당 창건일에 불거질 가능성이 있는 북핵 문제도 있다. 잠재적 위험은 현재와 같은 무정부체제에서는 효과적으로 관리되기 어렵고 자칫 우발적인 사건이 큰 재앙으로 번질 여지도 있다.
  유럽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뒤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했다. 프랑스가 나토에서 탈퇴하는 등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집단안보체제로 유럽은 적어도 그 중심에서의 군사적 분쟁은 없게 됐다. 유럽 주변부에서는 수차례 분쟁이 있었다. 유럽의 집단안보체제는 그루지야 사태, 우크라이나 사태에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 경험을 동아시아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최근 방한한 독일연방의회 요하네스 플루크 전 의원(사회민주당)은 유럽의 집단안보체제 운영의 경험을 전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09년부터 2013년 독일 연방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동시에 그는 유럽연합 의회 외무위원, 나토 의원연맹의 의원으로 외교 일선에서 일했다. 그는 방한 기간 중 흥사단이 주최한 강연회와 동아시아평화국제회의에서 발표를 했다. 그 내용을 정리했다.


 독·프 우호조약이 그 시작


  플루크 전 의원은 2000년대 중반 일본 대사관 만찬에 초대받았던 일화를 소개했다. 일본에서 온 장관이 배석한 자리였다. 플루크 전 의원은 “그분들이 저를 초대한 이유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다시 일본에 데려오는데 제가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위안부 이야기도 오고 갔는데 일본 외교관들은 그 숫자를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급기야 플루크 전 의원은 그 숫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납북 일본인을 걱정하는 일본인과 위안부 숫자를 축소하고 그 실체조차 인정하지 않는 두 모습을 어떻게 동시에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동아시아의 과거사 문제를 두고 아직도 첨예한 갈등이 있다. 플루크 의원은 독일의 과거사 청산 노력에 대해 잠시 언급했다. “독일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고 그걸 인정하며 사죄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 세대를 이어 전후세대도 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플루크 전 의원은 “1954년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은 그 돌파구였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50년대부터 독일은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려는 노력을 했다. 보상정책, 배상정책을 도입했으며 독일 프랑스 체코 등은 교과서 공동편찬위원회를 설립했다”라며 “각 국가 입장에서만 역사를 쓰지 않도록 노력했고 그 노력은 성공한 편이다”라고 강조했다. 1960년대 들어서 서독은 서유럽 통합 정책을 추진하며 유럽 석탄철강공동체 협약을 맺었다. 또 나토에 가입하면서 서독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즈음 동독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다. 동독은 동부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고 코민테른과 관계를 유지했다. 그 후로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플루크 전 의원은 “당시 동독은 자국이 반-나치이며 서독이 나치의 후예라 주장했다”며 “사실은 동서독 모두 나치의 후손들로 베를린은 4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된 후 결국 2개로 나뉘었다”라고 말했다.
그 뒤 서독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동서독 사이에 교류는 없었다. 서독은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을 지킬 정도로 고집스러웠다. 할슈타인 원칙은 할슈타인 서독 외무차관이 1955년에 내세운 외교 원칙으로,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독일 민주 공화국을 승인하거나 동독과 수교하는 국가와는 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이에 서독은 베트남, 북한 등과 수교를 맺지 않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 후, 유럽의 집단안보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유럽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미국 케네디 행정부는 쿠바 미사일 기지 공습을 검토하며 현실화 될 경우 그 대응으로 소련 혹은 동독이 베를린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내다봤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직격타를 맞을 수도 있었던 동·서독은 3차 대전에 대한 우려를 공유했다. 1969년 집권한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서독 사이의 긴장완화에 나섰다
  플루크 전 의원은 “빌리 브란트 총리는 주도적으로 다양한 조약을 체결했다”며 “이에 동서독 양국은 유엔에 가입하고 상호 폭력행사를 포기했다. 또 동서독은 독일 통일을 진척시키자는 원칙에도 합의했다”라고 말했다. 동서독 사이의 긴장 완화는 유럽통합, 유럽집단안보의 첫 단추였다.
1975년, 헬싱키 협정이 체결된다. 헬싱키 협정은 3개 범주로 나뉘어있다. 첫째는 정치와 군. 둘째는 경제와 환경. 셋째는 인도주의에 대한 부분이다.  플루크 전 의원은 “특히 세 번째 범주를 두고 서유럽과 동유럽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헬싱키 협정에는 인권개선 언급은 없고 인적·정보·문화·교육 분야의 교류, 협력만이 강조되고 있다. 소련과 동유럽이 민감하게 여기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헬싱키 협정은 나토와 바르샤바 동맹 35개 회원국들이 최종 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플루크 전 의원은 “극단적인 고립주의 노선을 고집하던 알바니아만이 최종 서명하지 않았다”며 “당시 미국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도 헬싱키 협정에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으나 함께 한다고 말했다”라고 이야기 했다. 헬싱키 협정은 유럽안보회의의 시초가 되었고 결국엔 유럽안보협력기구로 제도화 되었다.
  플루크 전 의원은 “1990년대에는 발칸반도의 분쟁이 있었고 나토가 유고슬라비아, 코소보를 공격한 일도 있었다. 세르비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도 분쟁이 있었다. 또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사태도 있었다”며 “분쟁이 터진 것 그 자체를 두고 일각에서는 유럽안보협력이 죽었다고 얘기하지만 유럽안보협력기구는 분쟁이 더 악화되지 않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플루크 전 의원은 독일 통일과 냉전 종식이 불러온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냉전이 보수적으로 종식되면서 나토의 역할도 축소됐다”며 “나토 내에서도 러시아 위원회가 구성되어 러시아를 파트너 국가로 인식하는 커다란 입장 변화가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나토 회원국들의 입장은 상이할 때가 많다. 2003년 이라크 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참전에  반대했다. 풀르크 전 의원은 “당시 나토 회원국들의 이해를 조정하려 했던 럼스펠트 국방장관은 유럽에 옛 유럽과 신 유럽이 있다는 이분법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며 “미국은 나토 회원국을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이고 독일은 분쟁의 불씨가 있는 국가 이를테면 우크라이나 등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 차이가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동아시아에서의 집단안보는?


  플루크 전 의원은 “동아시아에는 유럽안보협력기구와 같은 기구가 없다”며 “그래서인지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크다. 2013년 군사위기는 극심했다. 북한은 미국에 핵미사일을 쏘겠다고 말하고 미국은 온갖 최신 무기를 한반도 인근에 전시하듯 선보였다.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난 한국 정치인들은 “이것은 한반도의 문제다”라고 말할 뿐이었다고 한다.
  2013년 위기는 국제적이었고 협력기구가 없던 것도 큰 이유였다. 플루크 전 의원은 “지금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6자 회담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안보협력기구의 시초가 될 것으로 본다”며 “그런데 잘 되지 않는 이유는 각 국가들의 이해가 너무나도 다양해 그것을 하나의 틀로 수렴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아시아에는 경제 분야에서 다자 협력 기구가 여럿 있으나 안보를 다루는 협력기구는 없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구도는 미중 관계다. 플루크 전 의원은 “동아시아에서는 이제 중국의 역할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과 상반된 이해를 갖는다”며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고 현 상황 유지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주변 초강대국들의 이 같은 입장 때문에 남북관계 개선과 더 나아가 집단안보체제 구축이 어렵다는 것이다.
  유럽 내의 갈등은 군사적 성격을 꽤 탈피했다. 플루크 전 의원은 “터키, 그리스, 사이프러스, 몰디브, 코카커스 등에서 불거진 문제는 군사문제라기보다 국수주의적 포퓰리즘에 기반한 문제”라며 “그리스를 도와주는 것, 난민을 받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는 국내 정치 문제다. 물론 이런 것들이 발전하고 변해 국가주의적 성격을 보이거나 분리주의 운동으로 발전하면 국제문제가 되고 당연히 집단안보체제에서 다뤄야할 문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플루크 전 의원은 “독일은 독일이 다시 강대국이 돼서 2차 대전에 히틀러가 좋았던 환상을 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줬다.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는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은 독일과 달리 2차대전의 승자도 패자도 아닌 전쟁 피해자다. 그래서 주변국은 2차 대전 승전국들이 독일에 갖고 있었던 만큼의 두려움이 없다. 그렇기에 북한이 핵무기 개발 및 실험을 해도 큰 두려움은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플루크 전 의원은 오히려 “두려움은 북한이 갖고 있다.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지금까지 총 11번 북한을 방문했는데 여러 차례 북한의 군사 관계자들과 대화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적국은 미국이며 미국과 직접 협상을 해야 자국의 체제가 보장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래서 핵무기 보유가 안전보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이규정 디펜스21+ 기자 okeygu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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