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창우 서북청년단 상임부총재
해방공간에서 대표적인 극우 청년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이 2014년 11월28일 재건총회를 열었다. 서북청년단이 1946년 11월30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창립을 했으니 꼭 68년만이다. 이들은 세월호 추모리본 철거를 시도하면서 처음 존재를 드러냈고 250여명 회원을 모아 정식으로 총회를 열면서 큰 주목과 비판을 받았다. 해방공간(1945~1948년)에서 반공우익 테러의 선봉에 섰던 서북청년회를 다시 재건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서북청년단 깃발
해방공간에서 서북청년단의 활약상
먼저 서북청년단의 활약상을 되짚어보자. 1946년,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북은 그해 3월31일 토지개혁 완료를 선언한 상태였다. 북의 지주들은 저항보다 월남을 택했다. 월남한 북쪽 지주의 자제들이 남쪽에서 결성한 정치단체가 서북청년단이다. 함북(咸北)청년회, 북선(北鮮)청년회, 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 평안(平安)청년회 등 서북지역 청년단체들은 연합 성격의 청년단 이름을 서북청년회로 지었다. 하루아침에 기반을 잃고 고향을 등진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은 큰 증오의 대상이었다.
서북청년단이 활동하던 2년은 갓 해방된 국가에서 온갖 정치세력이 나선 시기였다. 정치세력은 서서히 좌우익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는데 국가의 기틀은 물론 공권력의 개념조차 불확실한 때여서 좌우익 대립은 무력충돌로 번질 때가 잦았고 서로에 대한 테러도 빈번했다. 이 시기 서북청년단은 우익 진영의 선봉을 담당했다.
특히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자에게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제주도 4.3 사건에서의 무차별한 양민학살로 제주도 인구의 10%에 달하는 3~4만여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또 서북청년단 단원인 안두희 당시 소위가 통일국가노선을 견지했던 김구를 암살한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2014년 재건된 ‘서북청년단’은 과거의 그 악명 높은 이름으로 세상을 놀라게는 했으나 규모와 활동내용은 미약하다. 배성관 사무총장이 처음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에 모집 글을 올린 9월15일 이후 연 첫 모임에는 15명이 나왔다. 현재 카페 회원 수는 80명이 채 안 된다. 서북청년단 회원명단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250명 수준이다.
서북청년단을 운영하는 주축은 3명이다. 맨 처음 서북청년단 재건발기인 모임을 제안한 배성관 사무총장(68), 이창우 상임 부총재(61), 정함철 구국결사대장(41)이다. 배성관 사무총장은 육군사관학교 25기로 2000년 대령으로 제대했다. 이창우 부총재는 전 한양대 건축공학과 겸임교수로 현재는 무궁화사랑운동본부 중앙회장을 맡고 있다.
해방공간으로 돌아간 듯 한 인터뷰
영화 <태백산맥>의 염상구(ⓒ태흥영화사)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인 염상구는 대동청년단 감찰부장이다. 지리산 빨치산과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그와 청년단원들은 빨치산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 가족들도 괴롭힌다. 2000년대 중반 소설의 무대가 된 벌교의 대동 청년단 사무실 건물을 방문한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2014년의 끄트머리에 서북청년단 사무실에 가는 길은 역사와 소설의 상상력을 동원시키기에 충분했다.
해방공간의 반공청년이 떠들썩하게 무용담을 얘기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들어선 사무실은 자금이 부족하기 마련인 여느 시민단체의 그것과 비슷했다. 건축설계 사무소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지, 혹은 미처 치우지 못한 짐인지 사무실 곳곳에 건축모형과 도면이 있었다. 도면과 모형만큼 곳곳에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 감사패 등도 걸려있었다.
응접실로 안내받아 가는 길에 언론에 크게 보도된 해골문양이 박힌 서북청년단 깃발을 지나쳤다. 해방공간의 그 많던 반공청년 대신 환갑이 넘은 이창우 부총재와 배성관 사무총장이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신문 <사이버 뉴스24> 발행인을 겸하고 있는 배성관 사무총장은 한창 홈페이지를 관리하던 중이었다. 이창우 부총재와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 부총재는 2014년 현재가 해방공간(1945~1948년)과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처럼 현재도 좌·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해방공간의 시대상과 서북청년단의 역할에 오랫동안 설명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백색테러를 저질렀던 서북청년단의 활약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설명했다. 다음은 이창우 부총재와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창우 서북청년단 부총재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창우 부총재(이하 이 부총재)= 한마디로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단체였으며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단체다. 서북청년단이 있어서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해방직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보다 남한에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해방공간에 김구, 김일성, 이승만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다 달랐다. 김구는 민족국가를 만들고 싶었고 김일성은 공산국가를 원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중에 김구가 상해임시정부를 만들고 2년 뒤 해방이 됐는데 그 2년 동안 임시정부가 한 일은 거의 없다. 또 임시정부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못 받았다. 또 김구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건국에는 반대를 했다.
바로 그 시점에 북한이 공산화되니까 지주계급(반공세력)100만 명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때 내려온 청년들이 보니 남한에도 공산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나쁘게 본 건 당연하다.
-서북청년단은 ‘민족통일국가’를 염원했던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 소위가 속한 테러 단체로 기억된다.
이 부총재= 김구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해야한다. 김구는 성시백이라는 공산주의자의 꼬임에 넘어가 김일성을 만나러 간 사람이다. 아직 살아있는 이철승씨도 김구의 평양행을 말렸지만 김구는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 회의를 하니 이미 짜여진 각본이 있었고 김구는 본인의 뜻을 펴지 못하고 빈손으로 내려왔다.
이승만은 김구의 암살에 대해 경고했다. 그런데 슬슬 김구가 이승만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는 것이다. 암살을 감행한 안두희는 포병 소위로 원래 김구가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 당원이다. 그리고 입대 이전에는 서북청년단 단원이기도 했다.
좀 복잡한 이력을 가진 사람인데 당시 재판기록을 보면 안두희는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구가 자꾸 공산주의에 물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안두희는 존경하는 분을 죽인 것에 대해 괴로워했다.
- 뿐만 아니라 서북청년단은 제주 4.3 사건에서의 무차별적인 양민학살과 수많은 백색테러로 기억된다.
영화 <지슬> 화면 갈무리. 제주도민들은 4.3 사건 당시 무차별적인 학살을 피해 동굴로 숨어들었다. (ⓒ설문대영상)
이 부총재= 서북청년단이 했던 활동을 테러라고 하는데 그건 그걸 싫어하는 좌파들이 테러라고 부르는 것이다. 되묻고 싶다.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공산주의를 쳐부순 게 테러인가? 해방공간에서 잘못하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가 될 뻔 했다. 제주도 4.3 사건도 큰 틀에서 보면 공산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북청년단이 그러지 않았다면 나라가 존재했겠느냐를 따져 봐야한다. 양민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상황, 그 시점에서는 빨갱이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양민이 아니다. 양민이면 왜 거기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나갈 생각인가?
이 부총재= 오늘의 현실에 맞는 전략으로 접근하겠다. 공권력이 약하다. 경찰들이 두드려 맞는다. 폴리스라인도 무시한다. 선진국은 국회의원이라도 폴리스라인을 넘고 공권력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잡혀간다. 공권력이 살지 않으면 나라가 살 수 없다. 민주주의를 지켜야한다. 우리가 공권력이 못하는 걸 할 것이다. 그러면 시위대로 공권력을 존중해야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중간역할을 우리가 하겠다.
풍문에 기댄 판단, 흔들리는 가치관
인터뷰 도중 이 부총재는 소문에 가까운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김구 암살에 대한 정당성을 논할 때는 “당시 김구가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라고 말했다. 김진태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법조계에 김일성 장학금 받은 판·검사 1800명 있다”라는 주장과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북한을 추종하는 간첩이 5만 명 있다”라고 한 증언을 언급했다.
근거를 물으니 “그 사람들이 괜히 그런 말을 하겠나?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라고만 답할 뿐이었다. 그는 현 정부 조직조차도 좌파가 장악했다고도 말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는 우파정부지만 공무원 중에 실장, 국장들은 김대중·노무현 좌파 정부에서 심어놓은 사람들이 다하고 있다”며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 직원 280명을 내보낸 것이 대표적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종북 개념은 간단했다. 그는 “좌파들은 한국정부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거 있으면 한국정부를 박박 긁는데 그들은 북한 인권에 대한 얘기 하나 없다”라며 “불만세력이라는 건 내것도 내거 네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세력이다. 그들은 자기 것만 챙기고 나라 걱정은 안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안 한다”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이른바 ‘좌파’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가 싶었는데 그는 의외로 좌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좌파가 예전부터 애국을 많이 했다. 이를테면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우파, 평범한 사람들을 좌파라고 치자”며 “관직에 있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애국을 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임진왜란에 들고 일어선 의병을 예로 들었다. 또 그는 “일본 공산당은 멋있는 공산당이다. 극우에 반대하는 멋있는 공산당이다”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좌·우 개념과 민족의식이 혼재된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 그렇다면 어떤 좌파를 척결하겠다는 것인지 물었다. 그는 “정도라는 게 있다. 국가를 흔들고 대통령을 흔드는 건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밥을 지어서 한 명이 대표로 밥을 푸는데 좀 잘 못 풀 수도 있다. 그럴 때 격려를 해야지 밥통을 엎으면 되나?”라고 말했다. 그는 “즉,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뽑은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일단 믿고 맡겨야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의 대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당선무효소송과 탄핵이 떠올랐다. 서북청년단은 국가를 흔들었던 대표적인 두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부총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때는 탄핵당할 정도로 말을 잘못 했을 수 있다”라며 “노 대통령이 얼마나 말실수를 많이 했나.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에게 그럴 이유가 없다”라고 짧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