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전쟁영화로 보는 현대 사회 (13)
민주화는 표현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표현의 자유는 여러 가지 부당한 이유로 침해받고 있다. 급기야는 (SF 세계 속의 얘기기는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내전까지 발생했다. 그것도 옆나라 일본에!
영화정보
원제: 図書館戦争(2013년작)
감독: 사토 신스케
원작: 아리카와 히로
출연: 에이쿠라 나나(카사하라 이쿠 1등도서사 역)
오카다 준이치(도조 아츠시 2등도서정 역)
쿠리야마 치아키(시바사키 아츠코 1등도서사 역)
다나카 케이(코마키 미키히사 2등도서정 역)
이시자카 코지(니시나 겐 특등도서감 역)
하시모토 준(겐다 류스케 3등도서감 역)
원작자인 일본의 소설가 아리카와 히로(有川浩, 1972~)는 여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데뷔 이후 한동안 SF, 군사물 관련 ‘라이트 노벨’을 연속으로 발표해 화제가 된 인물. 그 중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수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린 작품이 바로 <도서관 전쟁> 시리즈(2006년 미디어 웍스를 통해 첫 단행본 발간)였다. 이 작품은 2008년 SF 작품에 주는 일본의 문학상인 ‘성운상’ 일본 장편 작품 부문상을 수상했다. 또한 높은 인기에 힘입어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등으로 다양하게 미디어 믹스되었다. 이번에 다룰 영화 <도서관 전쟁>은 바로 소설 <도서관 전쟁>의 영화판이다.
원작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미디어 믹스되기도 했다.
다시 돌아온 분서(焚書)의 시대
배경은 세이카(正化, 1989년이 원년이고 작중의 시간적 배경은 세이카 31년이므로 서기 2019년에 해당한다)라는 가상의 연호가 쓰이고 있는 일본. 연호가 쇼와(昭和)에서 세이카로 바뀌면서 ‘공공의 질서를 해치고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표현’이 실린 대중매체를 검열을 통해 수거 및 소각할 수 있다는 내용의 ‘미디어 양화법’이 제정된다. 그리고 미디어 양화위원회 산하의 준군사조직인 ‘미디어 양화대’는 총기로 중무장하고 유해 미디어에 대한 압수와 소각을 진행한다. 세이카 11년(서기 1999년)에는 미디어 양화위원회에 찬동하는 민간인들이 총기와 화염방사기로 무장해 히노 도서관에 난입, 도서관원 12명을 포함한 일반인들을 살해하고 도서관에 불을 지르는 ‘히노의 악몽’ 사건까지 일어나지만, 경찰을 비롯한 정부는 이러한 폭거를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이에 도서관 측은 세이카 16년(서기 2004년) 준군사조직인 ‘도서대’를 창립해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검열에 무력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즉, 언론출판의 자유를 놓고 일본 국내에서 내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혼란의 와중에 카사하라 이쿠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미디어 양화대에게 책을 압수당할 뻔했다. 그 때 그녀의 책을 구해준 것은 어느 이름 모를 도서대원이었다. 그녀는 그 도서대원을 동경하게 되어 그를 찾기 위해 도서대에 자원입대한 것이다. 그녀는 도조 아츠시 교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도서대 내에서도 최정예부대인 태스크 포스에 배속 받는다.
때마침 17세 소년이 연쇄 살인을 저지르자 사회 여론은 살인의 원인을 소년이 읽었던 공포 소설로 몰고 간다. 카사하라가 근무하던 무사시노 제1도서관에는 PTA(학부모 교사 연합회)가 찾아와 공포 소설의 대출을 금지하라는 시위까지 벌이고, 얼마 안 있어 미디어 양화대가 문제의 소설들을 압수하러 쳐들어온다. 카사하라는 동료 테즈카와 함께 미디어 양화대를 막아낸다. 하지만 미디어 양화대는 만약을 대비해 회의실에 은닉해 두었던 서적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도서대 내에도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노베야마의 회장 노베야마 소하츠가 숨을 거둔다. 그가 운영하던 오다와라 정보역사도서관이 폐관되면서 도서대는 그 자료를 인수받게 되었다. 그 자료 중에는 미디어 양화법 성립 당시 부정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들도 있었다. 이 자료가 도서대에 넘겨지는 것을 미디어 양화대가 놔둘 리 만무했다. 도서대는 양화대에 맞서 오다와라 정보역사도서관의 자료를 확보할 준비를 하면서 노베야마 회장의 장례식에 니시나 사령관을 조문객으로 보낸다. 니시나 사령관은 ‘히노의 악몽’ 사건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도서대의 ‘상이용사’였다. 카사하라는 니시나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 니시나 사령관은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이나미네 사령관님이 남기신 것... 노베야마 씨가 우리에게 맡긴 것... 책이자 역사입니다. 이미 수많은 역사가 불타버렸습니다. 사상이 타버렸습니다. 진실이 타버렸습니다. 그것을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때 갑자기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이 장례식장을 덮쳐 니시나 사령관과 카사하라를 납치해간다. 그들은 20년 전 ‘히노의 악몽’을 일으킨 자들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범인들은 니시나 사령관을 인질로 삼고 오다와라 정보역사도서관에서 획득한 자료를 내놓을 것을 도서대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범인들과 도서대 간의 전화통화에서 카사하라가 이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리는 발언을 하고, 니시나 사령관의 의족에 달린 GPS 발신기를 통해 이들의 위치가 드러났다. 그곳은 타치가와 시의 폐업한 서점이었다. 니시나 사령관은 카사하라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했어.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는 진정한 이유를 알지 못했어. 그 덕분에 이런 세상을 남겨줘 버리고 말았지.”
도조와 테즈카를 앞세운 도서대가 두 사람을 구출하고, 과거 책을 지켜 준 ‘왕자님’이 도조였음을 카사하라가 알게 되면서 극은 끝을 맺는다.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어용단체가 일으킨 참변인 ‘히노의 악몽’
우스꽝스러운 군사적 고증과 묵직한 주제의식 사이의 언밸런스
하지만 이 책의 독자, 특히 군복무를 필한 독자라면 이 영화의 전투 장면을 보고서 피식거리는 비웃음을 멈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무나도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원작의 전투 장면 및 그 이면에 깔린 설정들은 해당 분야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없이 작품을 만들 경우 어떤 꼴이 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전에 정해진 시간만 싸울 수 있다 던지, 미디어 양화대는 조준사격을 하는데, 그들로부터 책을 지켜야 하는 도서대는 위협사격만 한다 던지 하는 설정들은 살상무기로 하는 싸움, 즉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싸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증거로밖에 볼 수 없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총기는 ‘더욱 화끈한 액션을 위한 소도구’ 이상의 의미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소설판에서 이미 문제점이 지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설정은 애니메이션판은 물론 영화판에도 아무 수정 없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물론 ‘힘을 가진 국가기관 간의 경쟁을 좀 화끈해 보이는 방법으로 묘사한 것(실제로 극중에서 미디어 양화대와 도서대는 양쪽 다 나름대로의 법적 타당성에 기반해 움직인다)’ 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무력 분쟁의 엄청난 확전 가능성을 체감하고 있을 본지 독자들에게는 코웃음만 쳐질 설정일 것이다. 굳이 작중의 일본 내에서 ‘내전’을 일으키고 싶었다면 앤디 맥넵(영국 특수부대 SAS 출신의 소설가)나 리처드 마친코(미국 특수부대 SEAL 출신의 소설가)한테 자문을 얻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긴 원작자 본인도 이런 한계를 눈치 챘는지 요즘은 군사물은 거의 쓰지 않고 있다.
이런 부분 때문에 비난은 받지만 이야기 그 이면에 숨은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바로 인간의 생각을 전달할 자유, 즉 ‘언론·출판의 자유’가 공격당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언론·출판의 자유는 시민 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기록매체(종이) 위에 대량으로 복제해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할 힘을 얻게 되었다. 그 힘을 통해 근대 시민 계급은 자신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봉건 왕조를 물리치고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권력을 안겨 준 그 힘을 ‘언론·출판의 자유’라고 명명했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진시황이나 히틀러 등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책들을 모아 불태워버린 분서(焚書)를 저지른 것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아니, 군사독재가 엄존하던 1980년대까지의 우리나라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정희, 전두환 두 독재자는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갖춘 자유 언론이 자신들의 장기 집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언론자유수호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1980년대 언론통폐합과 출판사 신규 등록 제한 등도 모두 이러한 발상에서 나온 조치들이었다. 비록 우리뿐이랴. 이 영화에 나타난 것 같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국가권력과, 그에 맞서는 사람들 간의 싸움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한 일부 국가들에서는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민주화를 달성한 국가에서도 여전히 언론·출판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이들은 존재한다. 이 영화와 영화의 원작이 만들어진 나라인 일본이(적어도 외견상이나 제도적으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언론·출판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것은 그런 나라에도 언론·출판의 자유의 ‘숨은 적’들이 의외로 많다는 의미이다. 그 적들은 대체 누구인가?
도서관은 책을 지키기 위해, 도서관 내의 군대인 ‘도서대’를 창설한다
자유의 숨은 적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숨은 적’은 흔히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라는 말로 표현되는 극도의 보수주의자들이다. 특히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일수록 자유로운 언론과 출판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하다. 그들에게 언론과 출판은 자신들의 자리를 엄청난 속도로 좀먹어 들어가는 ‘대체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종교는 단순한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고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고등한 신념 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종교를 믿고 있는 특정 사회의 생활방식이었고 정치권력이었고 문화예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적어도 민주화를 달성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국가에서는 종교의 권위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어떤 종교의 입장에서 봐도 자신의 종교를 나쁘게 말할 권리를 주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좋아 보일 리는 없다. 게다가 언론·출판, 더 나아가서 기성 종교적 색채가 탈색된 현대 문화 예술은 종교를 밀어내고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 제단을 차지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극한 반발로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대중문화는 지구정복을 노리는 사탄의 도구!”라며 출판물을 포함한 일체의 대중문화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이들에게 충분한 무력이 있었다면 탈리반의 바미얀 석불 폭파 정도는 우습게 보일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먹고사니즘’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했어...”라는 극중 니시나 사령관의 대사에서도 암시되듯이,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진리와 양심의 금문자’를 새겨 넣은 책들도 휴지조각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좀 엉뚱해 보이지만, 언제나 ‘만만한 희생양’을 찾는 군중심리도 언론 출판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극중에서도 연쇄 살인을 저지른 소년의 범행원인으로 공포 소설이 지목되었지만, 이런 일은 현실에서도 다분히 벌어진다. 작년 육군 제22사단 무장탈영사건(통칭 ‘임 병장 사건’) 때도 모 군사전문가가 “사고병사가 게임에 중독된 것이 탈영의 원인”이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은 것이 좋은 예이다. 사회에서 어떤 큰 사건이 발생할 때는 그것은 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중은 그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공격해도 반격을 못할 것 같은 쉬운 상대를 찾아 ‘화풀이’를 하는 버릇이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화풀이 상대 중에 언론·출판도, 문화 예술도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의 검열’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행위는 자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본이 다른 모든 가치를 밀어내고 가장 높은 가치가 될 때 그것은 어떤 독재자의 총칼보다도 언론·출판의 자유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이러한 위협은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 사회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지 않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언론·출판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아닌, 그저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더 많이 팔기 위해서라면 ‘자극적인’ 가십성 기사들을 헤드라인에 내걸고, 저질 상품도 광고주의 상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기사를 쓰고, 기사를 쓸 정보가 없으면 ‘소설’을 지어내서 분량이라도 채우려 하지 않는가.
대중들이 진정으로 알고 읽어야 할 컨텐츠들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 잊혀 가고, 그 대신 진실성과 효용성이 지극히 의심스러운 성공 처세서, 연예계 가십 등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언론 출판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기레기,’ ‘불쏘시개’ 등의 표현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도서관전쟁>에서처럼 미디어 양화위원회가 나타나 검열을 부활시키고 책들을 불태운들 누구 하나 신경이나 쓸까? 오히려 돈만 된다면 미디어 양화위원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어용 언론이나 출판이 나타나도 이상치 않을 판이다.
<도서관 전쟁> 프랜차이즈는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원작 소설 시리즈는 한 권도 빠짐없이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고, 애니메이션판과 영화판 모두 국내에 DVD로 발매되었다. 심지어 영화판의 경우 국내 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만화판 역시 한 권도 빠짐없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보수정권 들어 상당히 위축된 언론·출판의 자유, 실제세계의 아동청소년보다는 가상세계의 아동청소년을 더 잘 지키기 위해 제정된 듯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등이 그러한 인기의 배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씁쓸할 따름이다.
이동훈 디펜스21+ 객원기자 enitel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