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김종대│디펜스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더 아프다. 위관급보다 영관급이, 영관급보다는 장군이 진급이 좌절됐을 때 더 큰 상실감을 갖는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장교들이 일단 장군이 되면 웬만히 누릴 만한 명예는 다 누렸으니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예욕이란 것은 충족되면 될수록 배가 고파지는 무한 욕망이다. 장군이 되면 위계와 서열로 이루어진 거대한 욕망의 피라미드의 정상이 보인다. 눈앞에 최고의 자리가 보이면 보일수록 그곳에 도달하려는 충동과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지는 더 고취된다. 설령 장군 개인은 그러한 욕망을 초월했다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군대는 그러한 개인이라도 정신없이 경쟁에 몰두하게 만드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 위에 군대가 작동하고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어떤 때는 배신도 하고, 어떤 때는 미덕도 저버려야 한다. 따라서 이 군대의 실질적 통치자는 바로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비윤리적 견유주의(犬儒主義)를 제창한 마키아벨리일 것이다.
국방정책 굴절시키는 '양복 입은 군인들'
전문가는 편견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500년 전에 영국의 솔즈베리 경은 이런 말을 했다. "신학자의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은 모두 죄인이고, 의사의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은 모두 환자이며, 군인의 말을 들으면 세상 사람은 모두 전투원이다." 국가라는 유기체는 그런 편견의 집합체다. 이런 전문가들은 통제되어야 한다. 교사가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고 검사가 사법정책을 수립하지 않으며 의사가 보건정책을 수립하지 않는다. 정책수립은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행정 관료가 의회와 협력해서 한다. 군인이 국방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군인의 편견과 이익에 맞게 국방정책이 굴절된다. 이렇게 되면 군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군인의 직업의식이 군대 밖으로 무분별하게 표출되면서 사회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대립점이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진정되고 난 이후 미국 전략폭격사령부(SAC)를 방문한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에게 사령관인 토머스 파워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만일 핵전쟁이 일어나 소련에서 1명 살아남고 미국에서 2명 살아남으면 미국이 이긴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맥나마라는 거의 기절했지만 전면 핵전쟁을 준비하는 파워 장군에게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장군의 관점으로는 세상은 항상 전쟁 중이고, 마지막에 전투원이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지상명령 앞에 나머지 변수는 제거된다. 이것이 맥나마라 장관에게는 장군의 지독한 직업적 편견이었고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통제 장치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 고질적인 문제다. 국방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을 대리해 군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국방부가 군을 대리해 국민을 통제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군인이 직접 국방정책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군인의 권력과 명예를 향한 욕망이 군대라는 껍질을 벗고 민간 영역으로 범람했기 때문이다. 이 자제되어야 할 욕망을 통제하지 않으면 국가가 불행해진다. 이 점에서 장군이라는 존재는 국가안보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이 강조되는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요구에 맞게 통제되어야 하는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즉 장군은 안보의 주체인 국민의 대리인(Agent)이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민간 영역에 간섭하고 부당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권력자(Power)가 될 위험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