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바이칼 여행기 1_생은 가끔 변방에서 격렬해진다
글쎄, 저는 그곳에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니까요.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쿠바였어요. 온난화의 영향으로 겨울 내내 따뜻하다가, 며칠 북풍한설이 휘몰아쳤잖아요. 손은 곱아지고 벌겋게 튼 자국들이 손등에 겨울무늬를 새기는 걸 보며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료한 일상의 녹을 벗겨내기에는 심장을 흔드는 것 같은 라틴 재즈와 모히토, 모터 사이클을 몰고 안데스를 넘어온 까무잡잡한 피부의 쿠바 껄렁이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을 오래된 골목, 쿠바산 시가의 알싸한 향기..... 추운 겨울왕국에서 벗어나 도망가고 싶은 곳으로 쿠바는 딱 적당한 곳이었어요.
음악과 게으름과 사랑의 쿠바
내가 생각하는 쿠바는 음악과 게으름과 사랑이예요. 그곳에서는 밤새 음악을 듣고 술에 취하고, 카리브해의 일출을 보며 낯선 남자와 입맞추는 자유가 허락될 것 같았어요. 그곳에서는 하룻밤의 사랑조차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절대 자유가 넘치는 곳일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쿠바는 심장의 명령에 따르는 무한 자유와 공평한 가난, 늙음과 젊음의 경계없이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지는 심장의 울림이 있는 그런 곳이예요. 쿠바대신 지구의 얼음왕국 시베리아, 시베리아에서도 가장 깊고 먼 곳, 바이칼로 가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운명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군요.
나는 아주 늦게까지 늦잠을 잘 거예요. 어쩌면 자정을 지나고 오후 1시가 지나도 게으르게 몸을 뒤척일지도 모르겠어요. 적도의 태양이 덧창을 태울 듯 붉은 혓바닥으로 좁은 골목을 샅샅이 핥고 지나 간 후에야 느리게 몸을 일으킬 거예요. 밥은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을 거예요. 찐한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게으른 위를 달래고, 붉은 원피스를 입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후 심장을 찌를 것처럼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설 거예요. 밤에는 반드시 하이힐을 신어야 해요. 남자의 심장 깊숙이 파고들 송곳같은 하이힐을요. 왜냐면, 거기는 쿠바, 아바나일테니까요.
나는 분명 말레콘으로 가게 되겠지요. 카리브해의 파도가 여자를 납치하듯 밀려오는 말레콘 거리에는 낡은 자동차가 낡은 속도로 지나가고, 모터 사이클을 탄 쿠바 껄렁이들은 연신 휘파람을 불며 ‘세뇨리따~~’를 외쳐댈 거예요. 말레콘을 지나, 카리브해의 파도에 적당히 혀를 축인 후 체 게바라의 벽화가 그려진 골목을 지나, 나는 아마도 오비스포 거리에 있는 아무 카페에나 들어갈 거예요. 카페의 문을 열면 소프라노 색소폰과 반도네온 소리가 온 몸을 덮칠 거예요. 그곳 카페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나 콤파이 세군도를 닮은 늙은 가수가 ‘찬찬찬’을 불러줄지도 몰라요. 꽃무늬 헤어밴드를 하고, 검정색 마스카라에 흑장미색 립스틱을 바른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검정색 눈물을 흘리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사라지고 없겠지만, 카리브해의 태양에 삶을 태워온 쿠바 남자와 여자들이 만들어낸 찬란한 음악과 공평한 가난과 혁명의 붉은 심장이 거기 있겠지요.
생각하지 못한 반전 얼음의 왕국 시베리아
뜨거운 태양에 심장을 붉게 적시고 싶던 쿠바대신 태양의 저편, 얼음의 왕국 시베리아로 가게 된 것은 뜻밖이었어요. 생각하지 못한 반전이었지요. 겨울 러시아라니, 러시아에서도 가장 먼 러시아, 러시아에서도 가장 깊숙한 그곳, 바로 시베리아의 바이칼에 가게 되다니. 이 기막힌 반전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어처구니가 없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바이칼로 방향이 틀어진 것 우연을 가장한 운명같아요. 오래 가슴에 품었던 쿠바에의 열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의 남루함을 바이칼 얼음의 바다에 묻어 두고 왔기 때문일런지요.
바이칼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요.
광활한 대자연? 지구의 푸른 눈? 한민족의 기원?
글쎄요. 지구의 인구가 60억 명이라면 60억의 바이칼이 있을 거에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바이칼이 있을 거예요. 내게는 나만의 바이칼이 자라고 출렁이듯이 말이죠.
“좋았어.”
“아름다웠어.”
바이칼은 몇 음절의 감탄사로 담아낼 수 있는 곳이 아니예요. 바이칼에 도착했을 때는 막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붉거나 혹은 보라색으로 푸르게 저무는 얼음의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던 러시아 사륜구동 지프(푸르공)는 그대로 한 점 영원 속으로 소멸해가는 것 같았어요. 나는 얼음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지프의 꼬리를 따라가는 한 덩어리 별똥별이거나, 한 점의 먼지덩어리여도 좋았어요. 별의 꼬리를 물고 달리고 달려 마침내 수평선 끝에서 우주의 심연 속으로 까무룩 증발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요. 내 몸으로 만든 아이도, 한 시절의 뜨거움을 지나 쓸쓸함으로 늙어가는 남편도, 지겨운 밥벌이의 고단함도, 내 몸에 새겨진 숱한 기억과 상처들도...
얼음이 만들어낸 길 위로 펼쳐진 광막한 대지
바이칼의 얼음 두께는 생각보다 두텁지 않아요. 고작 2미터 혹은 3미터일 뿐이죠. 2미터 혹은 3미터만 파고 들어가면 시커멓게 출렁이는 호수의 바다가 있지요. 바이칼을 생명의 시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불완전한 얼음 덩어리 때문일 거예요. 겨울 바이칼이 거대한 얼음의 대륙으로 꽁꽁 얼지 않았다면, 그리고 얼음의 두께가 2미터 혹은 3미터에 그치지 않았더라면 바이칼은 생명의 시원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바이칼의 얼음이 결코 녹지 않는 빙하의 얼음이 되었다면, 녹고 흐르고 다시 얼어서 녹고 흐르는 생명의 순환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바이칼은 생명이 살지 못하는 불임의 얼음 덩어리로 남았을 뿐이겠지요. 2미터 혹은 3미터의 얼음 두께는 봄햇살에 스르르 녹아 멀리 앙가라 강으로 흘러 나가서 다시 북극해로 닿지요.
얼음의 바다를 뚫고 달리는 사륜구동 지프를 보면서 한 인간을 생각했어요. 아직 인간이 아닌 어떤 생명체, 이제 막 호모 사피엔스로 진입한 어떤 생명체. 바이칼의 물이 얼고 다시 녹지를 않았더라면 우랄산맥을 넘어 동진과 남진을 거듭해 한민족의 시원이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생명의 시원으로 불리지도 못했을 거예요.
얼음은 얼면서 세상에 없던 길을 만들어 주었지요. 광막한 얼음의 대지를 걸어간 한 사람이 있을 거예요. 바이칼을 처음 걸었던 한 생명은 거대한 얼음의 덩이에 갖혀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을 거예요. 그의 죽음 다음에 또 다른 죽음, 또 다른 죽음, 또 또 다른 죽음들이 죽음의 열을 지어 얼음의 바다를 건너려 했겠지요. 천년이나 이천년 혹은 천만년 이천만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얼음의 덩어리를 건져 저 끝에 닿은 한 사람이 나왔을지 몰라요. 바이칼의 얼음더미에 파묻힌 발톱 빠진 시신들이 얼마나 될지 우리는 알 수 없군요. 어쩌면 바이칼에 산다는 물고기의 종류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지요. 한 사람의 원시인이 하나의 종이 되고, 또 한 사람의 원시인이 또 하나의 종이 되어 바이칼의 물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것일지 누가 알까요.
알몸으로 누워있는 거대한 얼음의 대지, 얼음 사막은 그곳을 달려온 이들의 가슴 속에 1천700미터보다 더 깊은 심연을 만들었을 거예요. 낡은 사륜구동 지프는 흰 얼음의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멀어져가는 지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작은 배를 떠올렸지요.
작은 나무 쪽배에는 죽은 내 몸이 실려 있을 거예요. 바닥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을 거예요. 배는 바이칼의 심장을 향해, 지구의 끝 북극해를 향해 흘러가겠지요. 흘러 흘러가며 시나브로 물속으로 가라앉겠지요. 죽은 나를 실은 배는 1700미터 물속 깊이 가라앉으며 내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 살은 터지고, 두개골은 짓눌려지고, 검고 굳은 피가 검은 물속을 훠이훠이 떠다니겠지요. 한때 사랑과 증오와 슬픔과 연민으로 타들어갔을 육신에서 떨어져 나온 늙은 살점을 뜯어먹으며 바이칼 물속의 물고기들은 살이 오르고 눈에는 인광이 빛나겠지요. 오물이거나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민물 물고기의 뱃속에서 젖은 살점들은 다시 물고기의 살이 되고 다시 바이칼의 물살 따라 흐르며 한 덩이의 얼음으로 빛날 수 있겠지요. 그곳 원시의 얼음 덩어리에서 영원으로 회귀하는 내가 보였어요. 물고기의 뱃속으로, 허보이곶의 노란 민들레로, 바이칼의 얼음 덩어리로, 그리고 멀리 바이칼의 시원에 뿌리를 뻗어 목을 축이는 늙은 자작나무 한그루로,
쿠바에 가지 못한 게 아쉽지 않아요. 바이칼은 쿠바와는 또 다른 나의 시원이 되었어요. 바이칼의 얼음 위에, 바이칼의 몸 위에 몸을 포갠 이후 내 몸에는 바이칼의 바람소리가 새겨졌어요. 그대로 굳어버린 바이칼의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까지 내 핏줄을 뚫고 엷은 물빛 무늬로 출렁이고 있지 뭐예요.
바이칼의 바람 소리, 바람의 발자국 소리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5시간 10분을 달렸어요. 이르쿠츠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다섯시간을 달리고, 그곳에서 다시 사륜구동 지프를 타고 한 시간을 가서야 닿은 바이칼, 알혼섬.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나의 죽음이었고, 죽어서 다시 노란 민들레의 꽃대궁으로, 혹은 바이칼의 한 마리 물고기로, 혹은 바이칼의 바람소리로 몸을 바꾸어 생몰을 거듭하는 영원회귀 혹은 영원한 순환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바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어요. 얼음의 밑동을 지나는 바람의 걸음소리에 잠을 깼어요.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자궁, 그곳이 바이칼이었어요. 나는 어쩌면 늙은 지구의 자궁 속에서 작은 생명체로 떠돌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민족의 시원이 그곳인지 나는 몰라요 민족의 시원이라는 낡은 언어로는 바이칼의 물속을 담을 수 없어요.
우주가 시작된 곳, 생명이 비로소 시원을 연 곳이 바이칼일 거라는 걸 그곳을 가면 알 수 있어요. 학자들의 굳은 문장으로는 바이칼의 시원을 설명할 수 없어요. 본능으로, 직관으로, 섬광처럼 뇌수에 박히는 곳, 아니 온 몸에 지문으로 화인되는 곳이 바이칼이예요. 이제 겨우 돌칼 하나 손에 쥐었을 호모 사피엔스가 걸었던 길을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어 잠시 스치고 지나 왔네요.
자작나무 숲에 가을이 오면 다시 그곳에 갈 생각입니다. 다시 그곳에 갈 때에는 호모 루덴스로 오래 숲을 거닐고 올 것입니다.
바이칼의 몸속으로 풍덩 뛰어들어도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어둡고, 깊고, 고요할 것입니다. 늙은 엄마의 자궁 속으로 뛰어 들어 따스한 양수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물고기 한 마리로 떠돌지도 모르겠지요.
지구의 엄마, 늙고 애달픈 자궁, 나의 바이칼..
글: 김영주 쿠바를 꿈꾸는 부산 아지매
사진: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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