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인간병기가 주는 안보 인본주의의 역설

이동훈 2014.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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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원제: ロ-レライ(로렐라이,2005년작)
감독: 히구치 신지
원작: 후쿠이 하루토시
출연: 야쿠쇼 코지(마사미 신이치 소좌 역)
     츠마부키 사토시(오리가사 유키토 일등병조 역)
     카시이 유우(파울라 아츠코 에브너 역)
     츠츠미 신이치(아사쿠라 료키츠 대좌 역)
     이시구로 켄(타카스 나루미 역)

 

  명실공히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그 엄청난 스케일과 무수한 뒷이야기들은 수많은 창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옆 나라 일본에서는 그런 ‘있음직한 가상의 전쟁물 장르’를 가리키는 가공전기(架空戰記)라는 용어도 있을 정도다.
사실 알고 보면 그 동안 본 코너에서 다룬 영화 중 상당수가 가공전기물이다. <지팡구>, <전국자위대 1549> 등은 실존했던 전쟁을 다룬 가공전기물이고, <비상계엄>, <블루썬더> 등은 그 실현 가능성이 비교적 큰 현대, 또는 미래의 전쟁을 다룬 가공전기물이라 할 것이다. 이번에 다룰 <로렐라이>는 그 중 전자로,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본의 가공전기물, 그 중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을 다룬 작품이라면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소재는 바로 원자폭탄이다. 사상 유일의 핵 피폭국으로서 받은 미증유의 충격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하지만 현실은 영화보다도 더욱 드라마틱하다던가?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에도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이 있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 계획인 <다운폴> 작전에 따르면, 규슈 상륙 시 상륙군 화력지원용으로 패트맨 급(폭발력 TNT 21킬로톤 상당) 원자탄 7~15발을 투하할 계획도 있었다고 하니, 실로 모골이 송연해질 따름이다. 결국 투하되지 않았던 ‘나가사키 이후의 원자폭탄’. 로렐라이는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후쿠이 하루토시가 지은 소설 <종전의 로렐라이(終戦のローレライ)>를 극화했다.


도쿄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를 막아라

 

 영화는 1945년 7월 18일, 미 해군의 잠수함 <본피쉬> 호가 정체불명의 병기에 격침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군들은 <본피쉬>를 격침시킨 상대를 <아이언 위치(강철의 마녀)>라고 부르며 두려워한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좀 놀랍게도 이 장면은 실화에 어느 정도 기반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미 해군의 잠수함 SS-223 본피쉬 호는 7월 18일 일본 화물선 <콘잔 마루>를 격침한 후 일본 해군 해방함들의 반격으로 격침당했다고 한다)
 그 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특공(特攻: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뜻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구 일본군 내에서는 각종 자살공격을 우회적으로 부르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에 결사적으로 반대해 오던 일본 해군의 마사미 소좌(우리군의 소령)는 아사쿠라 대좌(우리군의 대령)의 지시에 따라, 군속기사 타카스가 운반해 온 독일제 잠수함 이(イ: 구 일본 해군의 잠수함의 함번 앞에 붙이는 기호)507의 함장이 되어, 다음번 원폭 투하 저지에 나선다. 이507에는 최첨단 음파탐지 장치인 <로렐라이>가 탑재되어 있었다. 원폭을 마리아나 군도의 B-29 기지로 실어 나르는 미군 군함을 그것으로 탐지하여, 격침시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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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의 주역 메카닉, 잠수함 이507호



  이507이 출항한 후, 아사쿠라 대좌는 행방불명이 된다. 일본 해군 군령부에서는 그를 찾아 나서지만,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한편, 이507 함 내의 분위기는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전쟁 말기의 혼란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승무원들의 구성은 정예라기보다는 오합지졸 쪽에 더 가까웠다. 정원 또한 부족했다. 게다가 함 내에서 이상한 노랫소리까지 들려왔다. 문제의 첨단장비인 로렐라이는 엄밀히 따지면 이507 함 내에 실린 것이 아니라 함에 탑재된 N식 잠항정에 실려 있었는데, N식 잠항정의 조종을 위해 함에는 특공병기 가이텐(回天:구 일본 해군의 자살병기. 93식 어뢰에 유인 조종실을 설치해 사람이 조종할 수 있게 개조한 것이다. 잠수함에서 발사되면 시속 56km의 속도로 목표물에 격돌, 조종사를 태운 채로 폭발한다)의 조종사 출신인 오리가사 유키토, 키요나가 키쿠오 두 일등병조(우리군의 중사에 해당)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종할 N식 잠수정에 실린 로렐라이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키요나가가 망을 보는 사이 오리가사가 출입금지 구역인 로렐라이 내부로 몰래 들어갔다. 하지만 로렐라이 내부로 들어간 오리가사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로렐라이의 내부에는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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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이의 성능은 1940년대 기준으로는 생각도 못할만큼 대단했다. 스코프에 3D 영상으로 잡힌 미군함의 모습.


 놀랄 새도 없이 이507은 미군 구축함에게 발견되었다. 총원 전투배치 경보가 울렸다. 이에 소녀가 자신의 몸에 이상하게 생긴 튜브를 연결하자 로렐라이는 작동했다. 무려 120마일(193km)까지 탐지할 수 있다는 로렐라이가 작동되자 잠수함 함교의 스크린에는 미군 구축함의 위치와 해저 지형이 3D(시대 배경이 1940년대임을 감안하자!)로 시현된다. 이507은 어뢰를 발사해 추격해 오던 미군 구축함 3척 중 2척을 침몰시키지만, 구축함이 침몰하자 소녀는 비명을 질러대며 실신하고 만다. 동시에 로렐라이도 꺼지고 만다.
  이후 함에 동승한 타카스 기사가 로렐라이와 소녀의 정체에 대해 한 설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소녀는 로렐라이의 핵심부품으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통해 그 소질이 육성된 초능력 인간병기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바닷물을 매개체로 작동하는 초감각이 있으며, 로렐라이의 스크린을 통해 봤던 탐지 영상은 그 초감각을 통해 얻어낸 것이었다.
  8월 8일, 아사쿠라 건을 수사 중이던 해군 정보주임은 니시미야 전 주미 대사의 집에 찾아간다. 니시미야 대사는 아사쿠라를 미국에 유학시킨 인물로, 그의 행방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집에 마침 아사쿠라가 쓴 편지가 온다.


  “나는 국가로서의 할복을 단행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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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가사에게 발각당하자 자살을 기도하는 파울라.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 모로 섬뜩한 의미를 담은 장면이다.


 소녀는 깨어났지만 계속 밥을 먹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소녀를 돌보는 임무가 오리가사에게 주어진다. 계속 소녀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오리가사는 가족사진을 소녀 앞에 흘린다. 오리가사는 군함의 장포장 타구치 토쿠타로 병조장에게 부탁해 특별히 아이스크림까지 만들어 소녀에게 준다. 그 때 소녀는 오리가사가 떨어뜨리고 간 가족사진을 돌려준다. 그리고 일본어로 말을 건다.
  “가족...”
  소녀는 그제야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밖을 보려고 한다. 오리가사는 소녀에게 승무원 옷을 입혀, 몰래 잠수함의 갑판으로 데리고 나간다. 소녀는 오리가사에게 자신의 이름이 ‘파울라 아츠코 에브너’이고, 할머니가 일본인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노래(흔히 <모차르트의 자장가>로 잘 알려진 가곡 <Wiegenlied K. 350>이다)를 부른다. 극 초반에 미군 군함을 격침시켰을 때, 그리고 이507의 항해 초기에 어디선가 들려오던 그 노래였다. 오리가사도 그녀에게 자신의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다. 마음을 열기 시작한 파울라와 오리가사 사이에 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파울라는 얼마 전 미군 군함을 격침시켰을 때처럼 또 급작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이507의 군의관은 그녀가 자신의 초감각으로 접한 많은 인간의 죽음을 견딜 수 없어서 그리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한다. 그의 추측은 옳았다. 파울라가 쓰러진 그 시각, 일본의 나가사키에는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타카스 기사와 장포장 등이 주동한 함상 쿠데타가 일어나, 마사미 함장은 배의 지휘권을 빼앗긴다. 쿠데타의 배후 조종자는 실종되었던 아사쿠라 대좌였다. 타카스 기사의 정체는 알고 보니 일본 해군 대위였다. 아사쿠라 대좌는 해군 군령부에도 나타나 해군 고급 장교들을 회의실에 감금하고 전쟁의 책임을 추궁한다. 그는 미국과 비밀 협정을 맺어 이507과 로렐라이를 미군에 인도하고, 도쿄에 3번째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뒤 제로베이스에서 신생 일본을 건국하고자 했다. 아사쿠라 대좌의 부하들은 일본 본토 오오와다 통신대도 점거한다. 마사미 함장이 말을 듣지 않자 타카스는 이507을 강제로 부상시켜, 군령부의 아사쿠라 대좌와 이507간의 통신을 연결시킨다. 이미 부상한 이507을 접수할 미군 구축함이 다가오고 있었다.    
  “휩쓸려 버리는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은 생각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생각할 필요 따위는 없다. 의식 있는 사람은 이 전쟁으로 모두 죽어 버렸다. 지금 살아있는 자 따위 모두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겁쟁이들이 만드는 전후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겁쟁이란 말인가.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도 겁쟁이인지 모른다. 하지만 대좌. 비난당해도 손가락질 당해도 살아남은 자는 용기 있는 자다. 당신의 말대로 이 나라는 잘못되고 있는지 몰라.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남으려 한 자라면 언젠가 반드시 일본을 다시 세울 수 있다. 총원 들어라. 우리는 원자폭탄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가족과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텐가.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오리가사는 파울라를 무단으로 갑판에 내보내 준 죄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이507의 선임장교 키자키 토시로 대위는 밸브를 열어서 잠수함을 급속 잠항시키라는 수신호를 보낸다. 그의 말대로 따르자 잠수함은 요동치면서 잠수했다. 분노한 타카스가 파울라를 인질로 잡고 함장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그는 쿠데타에 염증을 느낀 타구치 장포장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쓰러지면서 다시 장포장에게 응사해 그를 쓰러뜨리는 타카스. 마사미 함장은 배의 지휘를 회복한다. 미군과의 거래가 무산되자 아사쿠라 대좌는 “이것이 신생 일본의 개막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다. 미국과의 평화회담을 위해 움직이던 니시미야 대사는 이미 아사쿠라 대좌의 심복 츠치야에게 살해된 뒤였다.
  파울라의 초능력을 사용해 아직 숨이 붙어 있던 타카스로부터 도쿄행 B-29의 이륙시각이 15시간 후인 8월 11일 0630시임을 알아내었다. 마사미 함장은 독자적으로 B-29를 저지할 것을 밝히고, 이에 앞서 승무원들에게 작전 참가 선택권을 준다. 결전에 참가를 원치 않던 25명은 배에서 내렸다. 이 때 함 내의 모습을 찍은 군의관의 사진기도 하선자들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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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은 결국 B-29를 격추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미 B-29 발진기지가 위치한 티니안 섬에는 다수의 미군함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은 이507을 나포하기 위해 폭뢰 공격을 가한다. 이507은 로렐라이를 사용해 미군 함에  반격한다. 단, 사람이 죽는 것을 감지하면 쇼크를 일으키는 파울라를 보호하기 위해 신관이 작동되지 않은 어뢰를 사용해 미군 함 간의 연쇄 추돌을 일으켰다. 이로서 미군의 이507 나포 명령은 격침 명령으로 바뀌고, 더욱 강도 높아진 미군의 공격으로 이507은 파괴되어 가라앉는다. 키자키의 희생으로 파괴된 부위를 수리해 다시 움직이는 이507. 그러나 그들의 앞을 미군 잠수함이 가로막는다. 이507 함 내의 어뢰는 모두 소진했고, 남은 것은 계류된 N식 잠항정에 탑재된 어뢰뿐이었다. 그 어뢰를 사용해 미군 잠수함을 격침하지만 그 전투의 충격으로 파울라는 쓰러져 버린다. N식 잠항정에 함께 타고 있던 오리가사는 파울라의 함내 수용을 요청하지만 마사미 함장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계류색을 잘라 N식과 오리가사, 파울라를 떠나보낸다. “정말 소중한 것을 찾아 지키라.”는 말과 함께. 파울라의 손에는 마사미 함장이 준 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507은 미군 함대 한복판에서 부상, 이륙하는 B-29를 함포로 쏘아 격추시킨다. 도망치는 이507에 미군의 치열한 사격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507은 그대로 행방을 감추었다.
  종전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티니안 해변, 그 때 미군 함에 탑승했던 노병이 일본인 젊은이를 만나 자신이 겪은 이507과의 전투 내용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일본인 젊은이는 이507에서 군의관이 찍어 하선자들에게 전했던 승무원들과 파울라의 사진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젊은이의 시계는 파울라에게 전해졌던 마사미 함장의 시계였다. 노병을 떠나보내고 젊은이는 혼잣말을 한다.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끝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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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후 주인공들의 후손과, 포화를 나눴던 미국인 노병이 만나는 것으로 극은 끝난다.


  다른 작품과 역사의 잔영들


  이 작품은 일본 영화답게 상당히 스토리 구성이 오밀조밀하다. 그런 가운데, 기존의 여러 가지 SF 작품들이나 전쟁물, 심지어는 실제 역사의 흔적도 매우 직접적으로 느껴져 상당히 흥미롭다.
  우선 세 번째 원자폭탄을 저지한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전쟁만화가 고바야시 모토후미가 그린 블랙코미디 전쟁물 <동아총통특무대>와 매우 유사하다. 최첨단 병기의 ‘부품’으로 인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전쟁만화가 타키자와 세이호의 초기 단편 <키108개 귀환하지 않다>(여기서는 야간전투기의 레이더 부품으로 신통력 높은 무녀의 뇌를 적출해 집어넣었다)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아사쿠라 대좌가 해군 군령부에서 벌인 쿠데타 장면에서는 실제 역사에서 8월 15일 항복 직전에 일본 군부가 벌였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떠오른다(이 사건은 한도 가즈토시가 지은 <일본의 가장 긴 날>이라는 역사책과 동명의 영화로 묘사되었다) 여자주인공 파울라의 복장은 <제5원소> 릴루의 복장과 <스타워즈> 다스베이더의 복장을 크게 모방한 느낌이고, 그녀가 바닷물을 매개로 초감각을 발휘한다는 설정은 <건담>의 신인류 뉴타입을 연상케 한다. 일본의 구체제를 싹 없애 버리고 새로이 시작하겠다는 아사쿠라 대좌의 음모는 본 코너에서도 리뷰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편>, <전국자위대 1549>의 악당들의 계획과 일맥상통한다. 고장 난 잠수함이 승무원 일부의 희생으로 되살아난다는 설정은 여러 잠수함 영화의 뻔한 클리쉐지만, 실은 이것도 1961년 소련 잠수함 K-19호 조난사고라는 실제 사례가 있다(원자로 냉각기가 고장 나자 승무원 중 8명이 높은 방사능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고 냉각기에 들어가 수리를 완료했지만 결국 얼마 못 가 그들 전원이 방사능으로 인해 사망했다). 독일에서 가져온 첨단병기라는 부분에서는 대전 말기 핵무기 원료인 우라늄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중에 항복한 실존 독일 잠수함 U-234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이것 또한 <U보트 비밀일기>라는 승무원 수기와, <최후의 U보트>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나왔다).
기자처럼 ‘엄마 말 안 듣고’ 주구장창 전쟁영화와 SF영화, 전쟁사에 탐닉한 사람이라면 숨겨진 재미를 꽤 크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의 스토리 작가들이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꽤 여기저기서 많은 것을 참고했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여자주인공의 복장은 좀 깼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일본의 군대영화나 전쟁영화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영화도 개봉되자마자 국내 평론가들에 의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극우주의 영화”라고 ‘분탕질’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평은 상당히 부당하다. 아마 그렇게 단언하는 이들은 <더 콕피트>나 <라임색 전기담>, <감벽의 함대> 같은 망상에 가까운 수준의 일본의 극우영화 내지는 애니메이션들을 구경도 못 해보았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들이 일본 구체제의 완전한 괴멸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우익적 색채도 느껴진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지만, 모든 우익이 ‘극우’는 아니고 모든 좌익이 ‘극좌’는 아니다. 적어도 ‘극우 일본영화’라는 레이블이 붙으려면 ‘천황폐하의 만세일계’와 ‘대동아공영권을 수호하기 위한 성전에서 초개처럼 희생된’ 일본군 조직과 일본 군인들을 매우 멋지고 낭만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게다가 어차피 가공전기이니 만치, 현실적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화려한 전과(예를 들어 일본군이 워싱턴까지 진격한다던지...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국내에 수입 안 된 일본의 가공전기물 중에는 그런 류의 작품들도 꽤 많다)도 묘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스토리는 결과적으로 볼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 그보다 이 작품에는, “인간이야 말로 무력 분쟁의 주체이자, 궁극적 목적”이라는, 평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지내는 진리가 숨어 있었다.
  무력 분쟁, 그러니까 전투와 전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 없이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정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간단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최신예 첨단무기만 있으면 그 어떤 적도 우리를 감히 넘보지 못할 거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잘못 나아가면, 인간과 무기 중 무기가 더 중요하며, 무기를 운용하는 인간은 무기의 작동에 필요한 부속품이자 액세서리일 뿐이라는 위험한 사고방식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마치 프라모델 전차를 사면 몇 명씩 딸려 오는 전차병 인형처럼 말이다. 따라서 죽거나 다쳐도 얼마든지 저렴한 비용으로 교체가 가능(해야)하며, 무기의 운용권을 쥔 사람의 말 대로 뭐든 군말 없이 따르는 규격화되고 수단화된 인간을 이상적인 무기의 운용자, 즉 군인으로 여기는 사고방식까지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영화 속 로렐라이의 부속품 노릇을 하던 파울라처럼 말이다.
  물론 영어에서도 전쟁을 치르는 국가 기구 전체를 통틀어 war machine이라는 표현으로 부르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런 부분이 군대와 무력분쟁의 불가피한 속성이기도 하다. 전투는 결국 살인에 관한 것인데, 적과 싸우다 죽어 나간 병력은 빨리 보충될수록 좋고, 또 실전에서 작전대로 따르지 않는 부대는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계론적 인간관, 군대관을 국가를 이끄는 중심 철학으로까지 삼다가 망한 나라를 우리는 근현대에만도 여럿 알고 있다. 그 중에는 이 영화를 만들어낸 나라이자 영화 속 배경 국가인 일본도 포함된다.
  그렇게 무기만을 중시하고, 그 무기를 운용하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소홀한 국가는 결코 자국의 장병들에게 확고한 정신전력을 심어줄 수 없다. 나는 국가와 군대와 무기를 위한 부품이요 소모품에 불과한데, 뭐 하러 전투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가? 왜 부대 건제가 무너지거나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적에게 저항해야 하는가? 내가 없어져도 나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는데 왜 열심히 군복무에 임해야 하나? 이것이 ‘부품’으로 대접받는 병사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어떤 극단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는 이미 전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비효율적인 각종 자살 공격으로 전쟁에 필요한 수많은 인명과 귀중한 자원을 급속히 소모시켰다. 일본군 포로는 너무나도 쉽게 정보를 넘겨주었고, 일본군 포로수용소 내에서 기존 일본군 병영 내의 계급과 군기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포로가 되어도 선임자의 계급과 권위를, 원 소속 부대의 체계를 인정하고 따랐던 연합군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파울라가 불렀던 노래야 말로, 구 일본군의 그런 모습을 비판하고, 장병 개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되살리는 ‘신의 한 수’격 소품으로 보인다. 파울라가 극중에서 부르는 노래는 국가도 군가도 아닌 자장가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잠재울 때 부르는 노래이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다. 모든 군인은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딸인 것이다. 비록 언제라도 전쟁이라는 비참한 도박판에 판돈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신세이지만, 그들도 한때는 어떤 어머니의 금지옥엽 같은 귀여운 아기였던 것이다. 그 점을 자각하고, 다른 어떤 첨단장비도 아닌 그런 ‘사람’들이 국방의 주체라는 점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야 말로, 구 일본군과 같은 사이비 정신력이 아닌, 진정한 정신 전력 확보와 군 인권 확립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나?
 

  이 영화는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끝까지 지켰다.”라는 말로 끝이 난다. 주인공들이 지킨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확실한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대일본제국’과 ‘대동아공영권’, ‘히로히토 천황폐하’ 일 리는 없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국가 군대는, ‘조국’, ‘민족’, ‘이념’을 위해 목숨을 걸라고 장병들에게 설교해 왔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은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이어서 장병 개개인의 삶과 이렇다 할 연관을 짓기 어려운 것 역시 사실이다. 군대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군대에서 어려울 때 무엇이 당신의 버팀목이 되었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었나? ‘반만년 찬란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자존심’이었나? ‘인류 최고의 이념인 자유 민주주의’였나? 아마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가족’이, ‘친구’가, ‘연인’이 더 당신에게 지탱할 힘을 크게 주지 않았나? 그들은 모두 ‘사람’, 그것도 당신에게 큰 의미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병사에게 견뎌 나갈 힘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병역이 끝나면 돌아갈 장소이며, 동시에 병사가 병역에, 또는 무력 분쟁에 임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권력과 자원을 주기 위함이 바로 무력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사미 함장은 N식을 떠나보내며 “정말 소중한 것을 찾아 지키라.”고 말했다. 파울라에게 주어졌던 함장의 시계는 라스트신 속 젊은이에게 가 있다. 그리고 그 젊은이의 입으로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끝까지 지켰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들은 그 젊은이가 오리가사와 파울라의 후손일 수 있음을 확실히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지켜낸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다른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닌 그들의 소중한 사람들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 속 주인공들 뿐 아니라, 병역과 무력 분쟁에 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속마음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사석에서 누가 ‘조국과 민족’을 말하면 어색하고 촌스럽게 여기다가도, 공석에서는 앞 다투어 ‘조국과 민족’을 들먹이며 ‘입 애국자’가 되는 것인가? 그거야말로 가식이고 위선이고 표리부동이 아닐까? 스스로의 모습에 솔직해진다면, 우리가 왜 병역에 임해야 하는지 왜 안보를 생각해야 하는지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서구 문명이 르네상스 인본주의 정신을 통해 중세 암흑시대를 청산하고 화려하게 발전했듯이, 우리의 안보도 그동안 다른 거대 담론에 묻혀 소홀했던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루어야 크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우리는 무기와 같은 하드웨어 면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주변 4강을 마주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동훈 객원기자(enitel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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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군 전투복한국군 전투복

    문형철 | 2015. 08. 19

       매미울음과 강렬한 태양의 한여름, 바캉스 시즌에 맞춰 몸매를 뽐내면서도 고온다습한 기후와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능성 의류가 패션시장을 주도하는 계절이다. 군대의 전투복은 어떤가. 이런 계절별 환경의 특징을 잘 반영...

  • 영화 매트릭스-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 현대인영화 매트릭스-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 현대인

    2014. 11. 13

     영화정보원제: The Matrix(1999년작)감독: 워쇼스키 남매(라나 워쇼스키, 앤디 워쇼스키)출연: 키아누 리브스(네오 역) 로렌스 피시번(모피어스 역) 캐리 앤 모스(트리니티 역) 조 판토리아노(사이퍼 역) 휴고 위빙(스...

  • 선진국들의 스텔스 전투기 개발 현황선진국들의 스텔스 전투기 개발 현황

    2015. 01. 20

      전투기들은 ‘세대’라는 기준으로 나뉘고 있다. 한 세대별로 대표되는 특정 능력이나 기술을 갖출 경우, 그 세대에 포함을 시킨다. 최근 몇 년간 이슈가 되고 있는 5세대 전투기의 필수조건은 바로 스텔스(Stealth)이다. 스텔스는 쉽게 표...

  • ‘빠른 질주’ 앞에 모든 문명이 엎드렸다‘빠른 질주’ 앞에 모든 문명이 엎드렸다

    김보근 | 2013. 06. 20

    인류 최초의 스마트 무기 전차-① 전차의 발명과 전파‘역사를 바꾼 무기는 모두 스마트폰이다.’ 무기가 통신수단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강력한 새로운 무기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들 때와 같은 혁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어...

  • 방산비리 수사로 드러난 일광공영과 기무사의 검은 관계방산비리 수사로 드러난 일광공영과 기무사의 검은 관계

    김종대 | 2015. 06. 09

     천안함 5주기가 되던 지난 3월 26일에 도봉산 근처의 야적장에 방치된 컨테이너를 급습한 방산비리 합동수사단(이하 합수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속에서 일광공영의 이규태 회장의 각종 장부와 군 내부의 비밀자료, 몰카 형식으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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