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도널드 그레그 <역사의 파편들>(창비 2015)

이규정 2015.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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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하순 서울 힐튼호텔서 열린 한국어판 출판기념회에서 연설 중인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북한은 붕괴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젊고 아주 오랜 기간 북한을 통치할 것이다. 북한도 결국에는 통일이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 스스로가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협조할 수만 있을 뿐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5월 하순  자신의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창작과비평, 2015) 출판 기념식에서 이렇게 남북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89년 한국에 부임했던 그레그 전주한 미국대사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가 부임했던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 남한 내 전술핵 철수 등과 얽혀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안함 사건에 대한 ‘소신발언’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천안함이 한국군 기뢰에 의해 침몰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반정부 인사’로 비춰지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1989년에 그는 대사로 부임할 당시 ‘미 제국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레그 전 대사가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되자 국내 진보진영에서 그의 오랜 CIA 경력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가 CIA 서울 지국장으로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적극 개입한 것도, 천안함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발표를 불신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어느 한 진영의 인사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올 88살인 그레그 전 대사는 태평양세기연구소(PCI·Pacific Centurt Institute) 이사장으로 북한과의 비공식 접촉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2000년 이후 6번 평양을 다녀오며 북한과 독자적인 소통채널을 유지해왔다. 그가 주도한 북·미 민간 접촉은 공식접촉의 윤활유가 되기도 했으나 때로는 정치 논리라는 두터운 벽에 부딪쳐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그의 회고록에서 한반도와 관련된 주요 대목을 살펴본다.           
 02_그레그와김.jpg   그레그 전  김대중 납치사건 구명 등 특별한 인연을 맺은 그레그 전대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CIA 서울 지국장과 주한 미국대사 시절
                                                             
  1973년, 그레그가 서울에 온 것은 CIA 서울 지국장으로 부임하기 위해서였다. 베트남전쟁이 사실상 끝난 이 시점, 한·미관계는 삐거덕거리며 재정립되고 있었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이의를 제기했던 건 크게 두 분야다.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비롯한 신무기 구입 프로젝트, ‘유신헌법’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후퇴 및 야당인사에 대한 야만적 탄압이다. 이런 이유로 1979년까지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당시 그레그가 CIA 서울 지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맞딱드린 건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1973년8월 그레그 당시 CIA 서울 지국장은 필립 하비브 미국대사로부터 긴급히 호출됐다. 하비브 대사는 김대중 당시 신민당 대표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당해 행방을 모르니 CIA에 알아봐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CIA의 정보력을 이용, 다음날 김대중 대표가 납치 당해 이동하고 있는 곳이 ‘쓰시마 해협’이라는 대략적 위치까지 하비브 전 대사에게 전했다.
미국 정부는 김대중을 살리려 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확실히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가였다. 당시 하비브 대사는 청와대에 김대중이 죽으면 한·미관계는 크게 악화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레그는 하비브 대사가 “불한당 같은 부류들이 비열한 짓을 시도했기 때문에, 대통령인 자기가 신속하게 개입해서 그것을 저지했다는 스토리를 꾸며내게 했다”며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은 ‘대통령의 체면을 살리는’ 것은 아시아에서는 늘 최우선의 관심사이다”라는 걸 하비브가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회고록에서 그가 어떻게 김대중의 위치를 알았는지 등 CIA가 주도한 공작의 세부사항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CIA 지부장으로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고 실제로 김대중을 살릴 수 있었던 건 그의 뛰어난 정보 수집력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레그 전 대사가 여담으로 밝히고 있는 사례도 미국의 정보력에 허를 내두르게 한다. 그레그 전 대사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미국 모르게 독일로부터 초소형 잠수함과 모함(mother ship)을 구매하려했다. 그레그 전 대사와 한국 주둔 미 해군은 한국 측이 소형 잠수함 구매사실을 실토하도록 유도했다. 한국군이 독일제 잠수함 시험훈련을 하는 순간에 미 해군 제독이 “방금 발견된 적 잠수함을 공격하기 위해서 미국 제트기들을 긴급 이륙시킬 것”이라고 통보한 것이다. 한국군은 자국 잠수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CIA 서울 지국장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 근무를 거쳐 그가 다시 한국으로 온 건 1989년9월이다. 이번에는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한 지 한 달도 못된 10월13일, 또 사건이 터진다. 미국 대사관저가 6명의 전국대학생협회(전대협) 결사대의 급습으로 50분간 점령당한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17년이 뒤인 2006년 6명 중 4명을 만나 극진한 사과를 받는다. 그 중 1명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 의원이다.
  그는 이 사건을 회고하며 일본과 한국을 비교한다. 지나친 일반화라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으나 그레그 전 대사의 두나라를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그는 “극도로 위험한 일본인 테러단체가 도검으로 무장한 채 미국 대사관에 난입한 적이 있었다. 그중 몇 명은 감옥에 갔지만, 여전히 위험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들로 남아있다”며 이를 “두 나라의 완전히 다른 극명한 차이”라고 강조했다.
  1990년1월 그레그 전 대사는 광주를 방문해 깊은 인상을 받는다. 광주항쟁 후 딱 10년이 흐른 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비극적인 광주항쟁의 후유증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고 미국은 전두환 대통령의 잔인무도한 시위 진압에 연루된 적이 없다는 것을 한국민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 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방문 기간 중 “사과하러 왔냐”는 질문을 끈질기게 받았고 마지막 날에 미국의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광주 시민들의 적대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답변을 던진다.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 사과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너무 오래 침묵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광주항쟁이라는 극히 민감한 사안을 대하는 그레그 전 대사의 감각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원한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 그래서 기꺼이 자기들과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주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이 경험을 북한과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연결시킨다. “나는 편지에서 단절된 대화를 복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을 뿐, 대화 단절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북한을 상대하는 민간 외교관으로 그가 유지하고 있는 일관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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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그레그 전 대사


 북·미 비공식 접촉 주도한 민간 외교관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을 “미국 첩보활동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실패”로 규정한다. 이는 미국이 공작, 비밀작전 등으로 중남미 국가에 타격을 준 방식이 북한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까다로운 국가며,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민간 외교관으로 북·미 비공식 접촉을 주도했던 그레그 전 대사의 역할이 어쩌면 그 모델 중 하나일 수 있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레그 전 대사는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민간 외교관으로 한반도와 새로운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뉴욕의 코리아소사이어티(TKS) 회장, 태평양세기연구소(PCI) 이사장을 지내며 그는 6차례 평양을 방문하며 북・미 비공식 접촉에서 큰 역할을 했다.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으로서 그레그 전 대사는 평양 관리들의 뉴욕 방문, 북한 외무상의 1999년 뉴욕시 외교협회 방문 등 북·미 접촉의 불씨를 이어나갔다. 그에 따르면 2000년 들어선 부시 행정부도 북·미 비공식 대화 통로 재건에 힘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2002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연설 이후에는 북·미 비공식 접촉도 여의치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북·미 접촉을 시도한다.

  “나는 국무부에 내가 편지를 쓴 사실과 북한 방문 초청을 받은 것을 알렸다. 그전 같으면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겠지만, 틀림없이 북한 사람들이 나에게 누가 시켜서 그 편지를 썼느냐고 물을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편지를 먼저 쓰고 나중에 정부에 신고한 것이다. 나는 편지를 쓴 것은 순전히 내 아이디어였다는 것, 그리고 내 편지는 어떤 종류의 공식적인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사실대로 북한인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2002년4월 평양을 처음 방문한다. 이 때 그레그 전 대사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리찬복 중장 등을 만난다. 그레그 전 대사와 이들 사이에서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미국의 군사역량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그레그 전 대사가 1968년 북한 해안에서 작전을 하다 억류된 첩보함 푸에블로호 반환 문제를 거론하자 특히 김계관 부상은 “처음으로, 내가 말한 것을 종이에 메모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김은 푸에블로호 반환이 미국과 어떤 종류든 대화를 재개할 수 있게 해줄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라고 보았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0월3일 김계관 부상은 그레그 전 대사에게 “되도록 빨리 평양을 방문해서 우리의 논의를 더 진행할 수 있도록 합시다”라는 말로 끝나는 편지를 보낸다. 푸에블로호 반환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다음에 변수가 생겼다. 마침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던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무기 개발계획을 공표하면서 비난의 수위를 높인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그 뒤 평양에서 다시 김계관 부상을 만났다. 김 부상은 켈리의 방문이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푸에블로호 반환이 불가능해졌다는 의견을 전했다. 축소된 목표,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김정일 위원장과 강석주 외무성 1부상은 부시 대통령에게 북·미 고위급회담을 제안하는 친서를 그레그 전 대사에게 전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편지를 들고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찾아갔지만 “응답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다간 나쁜 버릇만 키워주는 게 될 테니까요”라는 반응만 듣고 만다.
  그리고 북한과 대화의 끈을 유지하자는 정도의 제안도 번번이 정치논리에 막혀 좌절됐다. 그레그 전 대사가 처음 김정일 위원장에게 편지를 쓸 때 그것이 개인 행위임을 강조했던 것도 “관료가 개인이 주도하는 행동을 좌절시키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2009년 김정은 제1비서가 대중 앞에 처음 나섰을 때도 그는 조 바이든 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김정은을 초청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공화당원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바이든이 내 제안을 묵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규정 디펜스21+ 기자 okeygu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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