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봄, 한·미 연합훈련은 열리지 않았다

이규정 2015. 0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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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신년사를 통해 “남조선 당국은 외세와 함께 벌이는 무모한 군사연습을 비롯한 모든 전쟁책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반도 북부를 선제 기습공격하기 위한 핵전쟁 연습”
1993년 북한은 한·미 군사훈련을 이렇게 규정했다. 22년이 지난 2015년 북한은 변함없이 "(북한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핵시험 전쟁, 예비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 관계자, 미국쪽 인사들은 입을 모아 한·미 군사훈련은 연례적이며, 방어적인 훈련이라고 못 박는다.  따라서 북한의 중단 요구는 부당한 것이며 핵실험 중단과 같은 정치와 연관시킬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판에 박힌 공방이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 양측이 정반대의 의견을 제시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까? 쉽게 객관화할 수 없다면 양측이 인식을 접근했던 때를 통해서 점점을 찾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남·북이 한미 군사훈련을 놓고 평행선을 달렸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이 유연한 태도를 취하며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은 국제핵사찰을 허용했던 때가 있다. 1992년 봄이다.
우선 냉전종식으로 미국이 한반도 내 핵탄두 철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 계기였다. 미국과 한국은 남한 핵무기 철수를 남·북 대화, 북·미 대화 지렛대로 사용했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 대화에 자신감과 의지를 갖고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며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왔다. 그러나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일단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으로 국제핵사찰을 얻어내자 한미 양국에 한미훈련 중단의 효용이 떨어진 것이다. 


  분명한 목적 있으면 한·미 군사훈련 중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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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한 미국 전략폭격기 B-52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까지 이어진 1992년의 남·북 해빙무드는 냉전종식의 산물이다. 냉전 막바지인 1990년부터 미국은 세계적 전술핵무기 철수 문제를 내부적으로 검토했다. 한국 내 미국 핵탄두는 1972년의 경우 무려 763개에 달했다. 1977년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당선된 지미 카터 대통령 주도로 핵탄두는 200여 개로 감축됐고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1989년에는 100여 개로 줄었다. 그리고 1991년 공식적으로 한국 내 미국 핵무기는 ‘0’ 개가 된다.
  미국의 전술 핵무기 철수에 이어 한국 정부가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이라는 중대결단을 내린 과정을 살펴보자. 1990년10월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 대사, 로버트 리스카시 주한미군 사령관, 두 명의 전임 주한미군 사령관과 함께 남한 핵무기 철수를 워싱턴에 건의했다. 해를 넘겨 1991년 봄에는 서울에서 그레그 대사, 리시카시 사령관, 청와대, 국방부 관계자 등이 회의를 열어 핵무기 철수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했다. 노태우 정부는 한국 내 미국 핵무기 철수가 안보 불안을 가져온다며 미국 측 제안에 반대했다.
  그러나 한국이 세계적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미  양측은 핵무기철수문제를 1991년8월7일 김종휘 안보수석과 폴 윌포위츠 국방차관 사이의 하와이 회동을 통해 담판 짓는다. 이 자리에서 윌포위츠는 남한 안전보장을 위해 핵무기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미국 국방부의 입장을 전했다. 남한 측은 이를 수용하되 핵무기철수를 북한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무기로 이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미 양측은 이 회동에서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도 논의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자율성을 보장해준 것으로 보인다. 노태우 대통령은 회고록에 ““(팀 스피티트 훈련은)남·북 대화의 진전에 따라 실시여부를 결정 한다”는 한국 측 의사에 따르겠다고 미국 측이 1992년 팀 스피리트에 대해 신축성 있는 입장을 표명해 와 우리 측 정치적 결단이 중요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는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방침을 정한다.
 미국 주도로 한국 내 미국 핵무기 철수는 약 4개월 뒤인 12월 완료됐으며 곧바로 북한 측에 통보됐다. 1991년12월8일 미국 군비관리군축국(ACAD·United States 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 로널드 레먼 국장은 방한해 “주한미군의 핵무기 철수완료사실을 북측에 통보해 북한의 핵안전협정 서명과 국제 핵사찰 수락을 전제로 남·북한 핵사찰 문제에 대해 북측과 사전 협의했다”고 청와대 측에 확인해주었다.
북한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가입국가로 의무적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사찰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 상태에서의 사찰은 거부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이 한국 내 핵무기를 철수한 이상 북한은 국제 핵사찰을 피할 명분이 없었다. 한국은 남·북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북한이 국제 핵사찰을 받게끔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거론하며 압박에 들어갔다.
 한국 국방부는 12월16일 “핵안전협정 서명과 상호 시범사찰 수락 의사 밝히면 1992년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할 방침”이라며 북한을 한 번 더 대화테이블로 끌어당겼다. 손풍삼 국방부 대변인은 “이 달 안으로 핵협상의 진전이 없을 경우, 미국으로부터의 훈련장비 이동에 따른 소요시간 등을 감안할 때 내년도 팀 스피리트 훈련은 예정대로 실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북한을 재차 재촉했다.
 이틀 뒤인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에 핵무기 없다”며 ‘한국 비핵화’를 공식화하며 쐐기를 박았다. 이에 북한은 12월23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이 앞으로 자국의 명백한 입장을 밝히리라는 전제 아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르는 담보(안전)협정에 서명할 것이며 합당한 절차를 통해 사찰을 받게 될 것을 천명 한다”고 밝혔다. 북한 노동당은 12월24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핵시설에 대한 국제사찰허용, 남한과의 핵협정 체결을 공식으로 승인했다.
 이어 남·북은 12월26일부터 31일까지 판문점에서 회담을 열어 핵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남측은 실질적인 ‘비핵화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 측은 ‘비핵화 지대’ 주장을 접고 노태우 정부가 제시한 방안에 응했다. 1991년 마지막 날, 남한은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하고 북한은 핵사찰을 허용하는 걸 골자로 하는 협상이 타결된다. 이렇게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문’이 탄생했다.
  그리고 1992년 약속대로 팀 스피리트 훈련은 열리지 않았다. 1992년은 건국 이래 가장 많은 남·북 대화(88회)가 열린 해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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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은<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효시켰다


‘대화파’ 따돌리며 훈련재개 발표


 이렇게 숨 가쁘게 돌아가던 남·북 대화는 1993년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8차까지 진행됐던 남·북 고위급회담도 남한 측의 ‘훈령조작 사건’이라는 황당한 사건으로 남·북 사이에 불신을 키운 채로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된다.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는 한·미 국방장관 연례회담에서 갑작스레 발표됐다. 이 결정과정에서 소외됐던 도널드 그레그 당시 미국 대사는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이 결정을 자신의 임기 중 “최대의 실수”라고 규정했다.
  물론 이 시기 남북간의 핵통제공동위 협상과 국제원자력기구의 북한 사찰과정에서 의혹이 제기되면서 비핵화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에 대한 초기사찰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얻어 북한이 과거핵 활동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게 됐다. 국제 핵 사찰단은 북한이 신고한 양보다 많은 플로토늄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그 차이는 g단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례적으로 영변에서 핵물질 재처리시설로 의심되는 건물 2채에서 핵폐기물 시설을 숨기는 장면을 담은 위성사진을 국제원자력기구에 공개하며 북한을 압박했다. 결국 한미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에 들어가고 남북이 훈령조작사건으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비전향장기수 송환 등 남북기본합의서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는데 중대한 차질을 빚게되는 상황에서 1993년 2월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을 결의하자 한달 뒤인 3월 북한은 핵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북한은 91년 말 핵사찰을 허가하고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북미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전혀 얻지 못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효된 다음날인 1992년1월21일 미국에서 김용순 당비서겸 국제부장과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만났다. 이는 한국전쟁에서의 휴전협정 이래 북미가 만난 최고위급 접촉이었으며 북은 이 회담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재무장 억재 등 동북아 세력균형에 한정된 역할로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북미 관계정상화에 대한 어떤 희망적인 발언도 들을 수 없었다.
 캔터 정무차관은 사전에 준비된 발언요지를 그대로 읽었다. 그는 핵사찰 허용과 핵개발 계획 포기를 촉구하는 미국의 기존요구를 반복할 뿐이었다. 김 국제비서는 후속대화에 대한 합의, 공동성명서 등을 요구했으나 미국 측은 모두 거부했다.
  92년 한미간의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합의에 대해 군은 일찍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한·미  국방장관 연례회담이 열린 1992년5월17일 로버트 리스카시 주한·미 군 사령관은 북한 핵사찰이 이뤄지지 않으면 93년 팀 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남북 핵통제위 협상이 난항을 겪고 북한에 대한 핵의혹이 언론을 통해 본격화하자 93년 팀스피리트 훈련재개를 발표했다.  놀라운 건 북·미관계, 남북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게 분명한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 발표에 앞서 이들이 워싱턴, 부처 간 정책위원회 등에 통보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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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블릭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북한 영변을 방문한 뒤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이라고 주장하던 시설이 재처리시설임을 주장했다


 그레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이 이 결정의 책임자였습니다. 저와는 전혀 협의가 없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앞서 2년 간 진척된 거의 모든 일들이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라고 <미국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레그 대사는 한국 군인들이 이 훈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이 한국을 방위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한국 군 일부에서는 팀 스피리트 훈련을 그 때 상황의 재연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의 재개를 원했던 군 인사들이 있었던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그들은 무지했고 남·북 관계에 미칠 영향을 모두 무시했습니다. 현재 북한과의 문제는 미국이 이렇게 대북정책에서 연속성을 보이지 못했던 것과 상당부분 관계가 있다고 생각 합니다”라고도 덧붙였다.
  1993년 재개된 팀 스피리트 훈련에는  3월9일, 한국군 7만, 미군 5만이 참여했으며 해외에서 1만9천명 미군이 추가로 투입됐다.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도 왔다. 91년 말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김정일은 3월8일  “한반도 북부를 선제 기습공격하기 위한 핵전쟁 연습”으로 이를 규정짓고 전 인민과 군에 “전시 준비태세” 돌입을 명령했다. 북한 병사들의 휴가는 취소됐다. 전 부대에 탄환이 지급됐고 평양 시내에 청사를 장갑차가 둘러쌓다. 동시에 북한은 IAEA가 결정한 특별 핵사찰 수용 불가 입장을 반복해 알렸다. 그리고는 이 훈련의 와중인  3월12일 NPT 탈퇴를 선언한다. 북한은 첫째, “핵전쟁을 도발하기 위한 최종 연습”인 팀 스피리트 훈련이 NPT 및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의 정신에 위반되며 둘째, IAEA의 2개 시설 특별 핵사찰 요구는 “북조선을 무장해제시키고 사회주의 체제를 압살하려는 노골적인 우격다짐”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규정 디펜스 21 플러스 기자 okeygu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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