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수사결과, 지난 30년간 단 한 건도 바뀌지 않아

2015. 02.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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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2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내용 가운데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재연 사진

 

  2013년 8월 22일 낮 2시. 필자는 그날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고등법원 내 한 법정에 앉아 있었다. 무려 30년간 자·타살 공방을 벌이고 있는 한 군인의 민사 항소심 선고 결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건은 1984년 4월 2일 시작되었다. 이날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허원근 일병(당시 22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이 스스로 총을 쏴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군 복무 염증에 의한 전형적인 군인 자살 사건으로 처리될 줄 알았던 이 사건은, 하지만 이후 30년간 진짜 사망 원인이 무엇이냐를 넣고 치열한 논쟁을 하게 된다.

  군은 허원근 일병이 가혹한 중대장의 업무 지시와 폭언, 폭행 등으로 인해 비관하여 자살한 사건이라고 정리했다. 하지만 유족은 믿지 않았다. 특히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 씨는 아들이 사망한 후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허원근 일병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군 의문사’로 세인들에게 언급되고 있다. 현재도 방송과 신문이 군 의문사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다.

  허 일병 사망사건에서 가장 큰 의문은 바로 허 일병의 사체에서 발견된 세 발의 총상이다. 허 일병은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모두 세 발의 총상을 입고 숨졌다. 유족이 가장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발하는 의혹도 이것이며, 허 일병 사인은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의심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허 일병이 자살하고자 스스로 좌·우 가슴에 한 발씩 총을 쐈는데, 그래도 죽지 않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을 쏘고 자살했다는 군 발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상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주력 총기로 사용하는 M16 소총은 당장 바꿔야 한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총알을 두 발이나 맞고도 죽지 않는 총으로 무슨 전쟁을 하냐는 조소였다.

더구나 M16 소총을 직접 다뤄본 군 전역자들은 군의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는다. M16 소총의 위력을 안다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설령 총탄을 비껴 맞아 즉시 사망하지 않았다 해도 그 충격과 고통으로 기절할 수밖에 없는데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스스로 총을 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말한다. 하지만 군의 입장은 불변이다. 국방부는 지난 30년 동안 허원근 일병은 자살했다는 말 외에 나머지 남는 의문에 대해서는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런데 세 발의 총상 외에도 허원근 일병 사건에서는 중요한 의문이 또 있었다. 바로 ‘피’였다. 허 일병이 총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접한 7사단 헌병대가 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헌병대는 허 일병의 사체와 사건 현장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런데 헌병대가 촬영한 사진 속에서 허 일병의 아버지는 이상한 점을 확인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허 일병은 무려 세 발이나 총상을 입었다. 당연히 허 일병의 몸에는 모두 6개의 관통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와 빠져나간 사출구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통상 사입구는 작으나 빠져나간 사출구는 그보다 훨씬 구멍이 크다. 그렇다면 이 총알 구멍들을 통해 허 일병의 몸에서 흘러내릴 피는 어느 정도의 양이 될까? 법의학자들은 적어도 몇 리터에 달하는 양의 흥건한 피가 현장과 사체에서 보여야 맞는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깨끗했다.

  너무도 상식 밖의 현장에 대한 의문에 대해 군 헌병대의 답변은 어처구니없었다. 흘러내린 피가 땅과, 입고 있던 허 일병 옷에 스며들어 사진 상으로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피가 땅에 스며든다 해도 빨대처럼 작은 구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상당한 넓은 면적으로 그런 흔적이 남아야 옳은 해명이 될 수 있다. 또한 옷에 스며든다면 거기서도 그런 넓은 핏자국이 보여야 인정될 수 있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런 흔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땅도 옷도 거의 핏자국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궁색한 군 헌병대의 변명조차도 끝내 피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 의혹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2010년 허원근 일병 유족이 낸 민사소송 1심 판결에서 당시 재판부가 “허 일병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며 사건 현장은 조작되었다”는 근거로 삼은 증거였다.

 

 사라진 허 일병의 신체 조직


  바로 ‘허원근 일병의 뇌 조직이 어디 갔느냐?’였다. 군은 사망한 허 일병이 좌·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을 쏴 자살했다고 했다. 그런데 법의학적 분석 결과 머리는 가장 마지막에 총격이 가해졌는데 이로 인해 허 일병의 머리 부위는 상당히 큰 손상을 입게 된다. 따라서 얼굴 피부 조직과 머리 뼈, 그리고 뇌 조직 등이 흩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사건 현장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면 당연히 현장에는 허 일병의 손상된 신체 부위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없었다. 피도 없었고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각 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건 민사소송 1심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 김OO 부장판사는 2010년 2월 3일 “허 일병의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증거 자료,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수사 자료 등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선고한다.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 발생 무려 만 26년 만에 내려진 새로운 법정 결론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이 타살됐다는 유력 증거 중 하나로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각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현장에 출혈 흔적이 없다는 의혹에 대해 “피가 땅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군의 황당한 해명과는 달리 재판부는 이 사건에 더 큰 의혹이 있다고 판단하여 타살로 결정지은 것이었다. 총상으로 손상된 허 일병의 머리 부위 신체 조직도 헌병대 촬영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단서가 됐다. 더욱이 재판부는 이 사건을 해외 법의학자에게 의뢰했다. 그들이 보내온 답은 간결했다“피는 설령 땅에 스며들 수 있어도 뇌 조직은 땅에 스며들 수 없다.” 즉, 허 일병이 발견된 장소는 허 일병이 사망한 장소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러자 재판부는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사망한 허원근 일병을 사체 발견 장소로 옮긴 것이며, 따라서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그날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시간에 비하면 얻어낸 결론은 미약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고, 남은 의혹에 대해 명쾌하게 다 밝혀내지 못했지만 이번 판결로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기다린 보람 끝에 이겼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심 결과를 접한 국방부는 곧바로 반발했다. “사실 인정 및 법리상 오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1심 판결에 불복, 바로 항소했다. 그래서 열리게 된 2013년 8월 22일 민사소송 2심 판결일. 나는 이 2심 선고를 보기 위해 그날 법원에 갔다.


 2심 재판부 허원근 ‘자살’ 판결, 30년 돌아 다시 제자리로


  잠시 후 서울고등법원 민사합의 9부 강OO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려진 선고. 설마 했던 우려는 사실이 됐다. 타살로 인정되었던 1심 선고는 항소심에서 또 다시 자살로 뒤집혔다. 1984년 당시 7사단 헌병대가 자살이라고 발표한 후 이 사건은 정부기관 조사와 재판을 통해 모두 네 차례나 자·타살 결과가 번복되었다. 2002년 1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허 일병이 타살되었다고 발표하자 당시 국방부는 특별조사단을 임의로 구성하여 재조사한 후 다시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2004년 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국방부가 억지를 부린다며 다시 타살이라고 발표했고 이후 유족이 낸 민사소송에서 2010년 1심 재판부가 타살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런 허 일병 사인이 다시 그로부터 3년이 지나가던 2013년 8월 민사 2심 선고에서 다시 자살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만 29년을 돌고 돌아 결국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자살로 결론을 내린 민사2심 재판부의 판단은 1984년 7사단 헌병대의 수사 결과를 ‘사실상’ 그대로 반복했다. 더 밝혀진 것도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는 29년 전 그 ‘자살론’ 그대로였다. 먼저 세 발의 총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재판부는 “망인과 신체 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의 발사 자세를 취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밝혔다. 자세가 가능하니 자살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시연한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연자는 그 자세로 보여준 것일 뿐 실제로 좌·우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마지막 세 번째 자세를 할 수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그런 자세가 가능한지만 보여준 것뿐이었다. 가슴뼈가 부러지고 몸에 4개의 큰 구멍이 이미 발생한 상태에서 다시 또 자신의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격을 가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재판부의 결론은 참으로 ‘신비한’ 주장이었다.

  사실 나는 항소심 결과를 앞두고 우려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살로 처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언급한 것처럼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허 일병의 뇌 조직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다 해결할 수 있어도 그 뇌 조직이 사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방법도 변명도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합리적인 재판부라면 그것을 무엇으로 피해갈 수 있겠나 믿은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어처구니없었다. 놀랍게도 답은 간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현장에 피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땅에 스며들었다는 군 헌병대 답변은 옹색한 수준을 넘어서는 황당한 논리를 가져왔다. “M16 소총탄의 회전력으로 혈액이 비산(날아서 흩어짐)하여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뇌 조직 역시 “그렇게 어디론가 날아간 것으로 판단된다”였다. 재판부는 그렇게 모든 의혹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후 자살이 맞다며 유족에게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나는 정말 그 판결을 들으며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의 위력이 보잘 것 없어 무려 세 번이나 총을 쏴야 사망할 정도였다고 하면서, 또 반대로는 소총의 회전력으로 그 모든 것이 비산되어 사라졌다는 이중적 논리는 너무도 뻔뻔하지 않은가.

  이런 판결에 대해 허 일병의 유족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허영춘 씨는 “국방부가 그동안 해 온 아들의 자살 주장을 판사가 그대로 말하더라”며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법정을 떠났다. 그러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며 상고했고 이제 이 사건의 최종 결론은 대법원으로 간 상태다.

  아버지 허영춘 씨 만큼은 아니겠지만 재판이 끝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던 나 역시 너무도 허탈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국방부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한번 내린 수사 결과를 바꿔 본 적은 있을까? 자신들이 내린 수사 결론을 이후 피해 유족이 반발하여 이의를 제기할 경우 다시 재조사하여 그 결과가 바뀐 사례가 있다면 과연 그 횟수는 얼마나 되며 그러한 구체적 사례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이 들면서 나는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국회 자료제출 요청권’에 따라 국방부에 공문을 보냈다. 허원근 일병이 사망한 1984년보다 2년 전인 1982년 1월 1일부터 만 30년 후가 되는 2012년 12월 31일 사이 기간 중 군인 사망사건에 있어 유족이 기존 수사 결과에 반발하여 재조사를 요구한 후 그 결과가 변경된 사례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대상자의 이름과 사건 개요, 그리고 사망 원인이 변경된 결과가 무엇인지 자료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여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마침내 내가 요청한 자료가 국방부 조사본부로부터 전달됐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그 문서를 열람해 보니 문서 분량은 고작 ‘한 장’이었다. 아니, 30년 동안 결과를 요청한 것인데 왜 이렇게 분량이 적나 의아했다. 그리고 읽어본 답변서의 분량은 딱 한 문장이었다. 그 답변을 그대로 인용한다.

  “요청하신 자료와 관련하여 군 헌병대의 1차 수사결과에 대해 유족이 이의를 제기하여 그 결과가 변경된 사례는 없습니다.”

  2015년 현재, 허원근 일병 의문사는 만 31년이 지나가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 군 사망사고중 하나인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사건은 올해로 만 17년째다. 많은 이들은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런 군 의문사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냐고. 나 역시 이 공문을 보고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군 헌병대 수사는 신이 하는가? 완벽한 신이 하는 수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지난 30년간 군이 한 수사는 단 한 건도 그 결과가 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전화를 해서 물었다. 내가 물어본 것이 30년 사이 기간인데 혹시 1948년 군 창설 이래 지금까지 바뀐 사례는 있는지 물었다. 정말 놀라웠다. 답변은 "단 한 건도 없다"였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제 답은 하나다. 군 헌병대가 군 사망사고 수사를 독점하는 지금의 상황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제3의 민간 외부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의 주장을 더 이상 국가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 허원근 일병처럼, 김훈 중위처럼, 그 외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는 수많은 군인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군 수사에만 맡기는 것은 또 다른 죄임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숨져간 모든 군인의 영혼을 위로한다. 이제 진실을 밝히자.

 고상만 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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