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벨바겐과 티거 전차를 만든 천재 기술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쉐. 오늘날 그의 이름에서 군대에 관련된 것을 떠올리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를 위해 각종 군용 차량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가 만든 차량 중에는 지극히 합리적인 차량들도 있었지만, 설계자와 발주자의 ‘광기’가 느껴지는 괴물 병기도 있었다. 고급 승용차의 명성에 비한다면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그의 이름은 오늘날 고성능 스포츠카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 차량 프라모델을 많이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프라모델의 설명서에도 포르쉐의 이름이 상당히 자주 거명된다는 사실을. 그렇다. 당대의 천재 자동차 기술자인 포르쉐는 히틀러와 독일군을 위해 다양한 차량을 설계함으로서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원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전후 범죄단체로 규정된 나치당과 친위대에 가입함으로서 나치 정권에 대한 충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인 인물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자동차 설계에 두각을 나타내
포르쉐는 1875년 9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었던 보헤미아 북부의 마퍼스도르프에서 판금공 안톤 포르쉐의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훗날의 명 엔지니어답게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강한 흥미를 보여, 라이헨베르크의 제국기술학교에 진학했고, 아버지의 가업도 도왔다. 그는 18세 때 빈의 벨라 에거 전기회사에 취직하는 한편, 대학 강의도 몰래 도강했다. 벨라 에거에서 5년을 근무한 그는 1898년 야콥 로너 베르케 사에 입사했는데, 이 회사에서 그는 자신의 첫 자동차인 에거 로너(C.2 파에톤)를 만들게 된다. 이 차량은 전기 회사 출신인 포르쉐의 작품답게 전기 자동차였다. 21세기인 요즘도 전기 자동차가 완전히 실용화되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하지만, 무겁고 효율 낮은 배터리 때문에 등판능력과 항속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포르쉐가 만든 사상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로너-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
그래서 포르쉐는 1901년, 로너-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 차량을 내놓았다. 이 차량은 배터리 대신 다이믈러사의 내연기관을 탑재하고, 이 내연기관이 발전기를 돌려 전기 차축 모터를 돌리는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 방식의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최대 시속 56km를 냄으로서, 당시 오스트리아 속도 신기록을 달성함은 물론 1901년 엑셀베르크 랠리에서 포르쉐가 직접 운전해 입상하기도 했다. 1906년까지 300대가 팔린 이 차량을 개발한 공으로, 그는 1905년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자동차 공학자에게 주는 푀팅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1902년 군대에 입대했다. 군 시절 그가 맡은 보직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전용 차량 운전병이었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1906년 아우스트로 다이믈러 사로 회사를 옮겨 그 회사의 수석 설계사가 되었다. 이 회사에서 그는 엔진 출력 85마력의 자동차 <모델 27/80(‘프린츠 하인리히’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 30마력급 자동차 <마야> 등을 만들어 유명해졌다.
포르쉐는 1916년 이 회사의 상무이사로 승진했다. 그리고 같은 해 빈 공대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가 1922년 설계한 경주용차는 같은 해 있었던 53개 대회 중 43개 대회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러나 1923년, 그는 향후 자동차 개발 방향에 대한 회사 동료들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아우스트로 다이믈러에서 퇴사한다. 몇 달 후 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다이믈러 모토렌 게젤샤프트에 기술이사로 취직했다. 이 회사는 당시 독일 자동차 산업의 중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도 여러 가지 우수한 경주용차를 설계했고 그의 설계는 축적되어 1920년대를 풍미한 경주용차 메르세데스 벤츠 SSK를 만들어낸다.
1926년 다이믈러 모토렌 게젤샤프트 사는 벤츠 운트 시에 사와 합병, 다이믈러 벤츠 사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포르쉐는 이사진과 충돌을 일으켰다. 작고 가벼운 차량을 만들자던 포르쉐의 생각을 대형 고급차를 선호하던 이사진은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929년 슈타이어 자동차회사로 옮긴다. 하지만 같은 해 말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슈타이어 사가 도산, 그는 실업자가 된다.
1931년 4월 그는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와 본인의 이름을 딴 포르쉐 사를 차렸다. 이 회사의 정식 명칭은 <명예 공학 박사 포르쉐의 엔진 및 차량 설계 및 자문 서비스사>라는 긴 이름이었다. 포르쉐는 오스트리아인 안톤 피에흐와 아돌프 로젠베르거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과거 직장 동료들이었던 카를 라베, 에르빈 라베, 프란츠 자베르 라임스피스 등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 회사에는 포르쉐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도 다니고 있었다. 회사가 어느 정도 커 나가자, 포르쉐는 다이믈러 벤츠 시절부터 구상해왔던 소형차 컨셉을 실현해 보기로 하지만, 누구도 그의 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신 경주용차를 만들었다. 막스 바그너가 1923년에 설계한 누적형 디자인의 벤츠 트로펜바겐을 기반으로, 대폭적인 개조를 거쳐 750포뮬라(운전자, 연료, 냉각수, 타이어를 제외한 공차중량이 750kg 이하인 차량으로 벌이는 자동차 경주)용 경주용차를 만든 다음, 자신의 이름 두문자를 따 P바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차를 사가겠다는 고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2년, 아우디, DKW, 호르히, 반더러 등 4개 자동차 회사가 합병해 아우토 우니온 사가 설립된다. 아우토 우니온 사의 대표이사이던 클라우스 폰 외르첸 남작은 신생기업인 자사의 힘을 보여줄 만한 프로젝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동료 이사인 아돌프 로젠베르거는 그런 그에게 포르쉐를 만나게 해주었다.
1938년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그의 국민차 공약(公約)은 결과적으로 공약(空約)으로 끝이 났다.
국민차의 탈을 쓴 군용차 생산과 나치당 가입
1933년 베를린 모터쇼에서 당시 수상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전국의 기계화를 목표로 제시했다.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일 국민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을만큼 저렴한 ‘국민차(Volkswagen)’의 보급, 그리고 독일 자동차 산업의 힘을 보여주고 발전시키기 위한 국가 후원 자동차 경주대회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포르쉐에게 엄청난 호재였다.
히틀러는 우수한 경주용차를 만들기 위해 메르세데스 벤츠와 아우토 우니온에 각각 연 25만 라이히스마르크씩의 국비를 지원해 주었다. 이에 아우토 우니온은 포르쉐 사의 자회사인 호흐라이슈퉁스 모터 사와 P바겐 프로젝트를 75,000라이히스마르크에 인수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구정복 야욕과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던 프로젝트는 다름 아닌 국민차였다.
포르쉐가 히틀러로부터 국민차 설계 요청을 받은 것은 1934년 7월이었다. 히틀러는 국민차에 성인 2명, 아동 3명의 탑승인원과 시속 100km의 속도를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990라이히스마르크(요즘 우리 돈으로 약 764만원)를 넘어서는 안 되었다. 참고로 독일인 노동자의 평균 주급이 32라이히스마르크이던 시절이었다.
포르쉐는 요구조건에 맞춰 공랭식 후방엔진, 토션바식 서스펜션, 그리고 풍뎅이처럼 생긴 독특한 외관이 특징인 소형 승용차를 설계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차, 폴크스바겐의 ‘비틀’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느 민간 자동차 회사도 이 차량을 단가 990라이히스마르크에 맞춰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국영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이 차량을 저렴하게 생산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회사가 <게추포(Gezuvor. ‘독일 국민차 준비위원회’라는 독일어 명칭의 줄임말)> 사였고, 이 회사는 1938년 폴크스바겐 공업 유한책임회사로 개칭, 오늘날의 폴크스바겐 사의 전신이 된다.
국민차 생산을 위한 준비는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전술차량 퀴벨바겐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독일 정부는 또한 폴크스바겐 구입을 위한 적금도 운용했는데, 주당 5라이히스마르크씩 저금해 만기가 되면 폴크스바겐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총 33만 6천 명이 이 적금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 중 폴크스바겐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939년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폴크스바겐 사는 폴크스바겐을 기반으로 한 독일군의 경전술차량인 퀴벨바겐(Kübelwagen)과 슈빔바겐(Schwimmwagen, 퀴벨바겐의 수륙양용형) 생산에 생산력을 모두 전환했던 것이다. 어이없게도 폴크스바겐 적금에 적립되었던 돈은 1945년 베를린을 침공한 소련군에게 약탈당해 버리고 만다.
한편 포르쉐를 아꼈지만 비독일인은 멸시하던 히틀러는 1934년 당시 체코 국적이던 포르쉐에게 독일 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유했다. 포르쉐는 바로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1937년에는 나치당과 나치당 산하 정치폭력조직인 친위대(SS)에도 가입했다. 그의 자동차 공장에는 친위대 병사들이 경비원 및 운전사로 일했고, 포르쉐 본인도 1942년에는 친위대 상급대령으로 진급했다.
광기 넘치는 괴병기들, <코끼리>와 <쥐>
포르쉐의 ‘삽질’이 낳은 괴병기, <페르디난트> 구축전차. 원거리 전투력은 뛰어났던 반면 주행성능이 나쁘고 근접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포르쉐 박사는 전차, 자주포를 비롯한 각종 본격 군용차량의 개발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 중에는 독일 전차의 대명사격인 티거(타이거) 전차도 끼어 있었다.
후일 티거 전차가 되는 독일 육군의 신형 중전차 채용을 위해 포르쉐는 1939년부터 <타입 100>이라는 사내 명칭으로 알려진 시제품을 제조한다. 특이할만한 점은 이 시제품이 포르쉐의 젊은 시절 명성을 안겨다주었던 하이브리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대의 포르쉐 V10 엔진을 작동시키면 엔진이 발전기를 돌리고, 그 전기로 모터를 돌려 구동된다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마치 전기모터로 달리는 RC 전차처럼 전차의 변속, 전후좌우진 전환을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신형 중전차는 최소 45톤 이상이 나갈 대물이었으므로, 이런 기구를 사용해야만 원활한 주행이 가능하다고 포르쉐는 생각했다.
<타입 100>은 개량을 거듭, 이름도 VK4501(P)로 바뀌어 1942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에 히틀러 앞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헨쉘 사의 시제품인 VK4501(H)를 채택. 이 전차가 훗날의 티거 전차가 된다. 어이없게도 포르쉐는 히틀러가 자신의 시제품을 반드시 채택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가 아직 채택도 하지 않았는데도 크루프 사에 VK4501(P) 차대 100대 분을 이미 주문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설계한 포탑은 헨쉘 사의 제품에도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점점 독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쟁 상황 상 완성된 차대를 놀려둘 수도 없었다. 결국 이 차대에 고정식 전투실을 설치하고, 티거 전차의 포를 능가하는 화력의 71구경장 88mm 대전차포를 탑재함으로서 구축전차 <페르디난트(Ferdinand, 포르쉐의 퍼스트 네임을 땀)>가 완성되었다.
<페르디난트>는 90대가 생산되어, 1943년 7월에 벌어진 동부전선 최대의 결전, 쿠르스크 전투에 첫 실전 투입되었다. 독일군이 공세를 지속하던 전투 초기, <페르디난트>는 무려 200mm 두께에 달하는 전면 장갑과 71구경장 88mm 대전차포의 강력한 화력을 십분 발휘, 원거리 전투에서는 거의 무적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투 후기에는 소련군의 조밀한 방어시설에 걸린 독일군의 진격이 지체되면서, 전투가 근접전 위주로 벌어지자 슬슬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페르디난트>는 자체방어용 기관총이나 전주위 잠망경 등 적 보병과의 근접전을 상정한 어떤 장비도 실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 거대하고 비싼 구축전차가 소련군 보병이 던진 화염병 따위에 격파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페르디난트>는 중량이 너무 무거워(65톤), 기동성도 신통찮았다. 최고속도가 포장도로 시속 30km, 야지에서 시속 10km가 도작이었다. 게다가 한 번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회수할 방법이 영 마땅찮았다. 이론상으로는 18톤 포차 5대를 연결해 끌고 가면 된다지만 정신없는 전투 와중에서 그럴 여유를 찾기란 힘들었다.
1943년 11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48대의 <페르디난트>는 전훈을 받아들여 약간의 개량을 거친 후, <엘레판트(Elefant, 코끼리를 의미)>로 개칭된 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다. 그러나 동부전선에 비해 산지가 많은 이탈리아는 <엘레판트>가 싸우기 적합한 전쟁터가 아니었다. 결국 계속 소모되어 가다가 끝까지 살아남은 4대는 베를린 전투에서 종전을 맞는다.
하지만 포르쉐는 이보다 더욱 정신 나간 전차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 <마우스(Maus, 쥐를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떠한 적의 공격에도 격파당하지 않는 무적의 전차 개념이던 <마우스>는 1942년 7월 포르쉐의 제안을 히틀러가 받아들임으로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1943년 12월에는 모의 포탑을 얹은 V1호차(시제 1호차)가, 이듬해 3월에는 실포탑을 얹은 V2호차(시제 2호차)가 완성되었다. <마우스>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상상을 초월했다. 장갑 두께는 제일 두터운 곳이 460mm였고, 어지간한 부위도 190~200mm를 웃돌았다. 전비중량은 무려 188톤. 주무장은 55구경장 128mm 대전차포 1문, 36.5구경장 75mm 대전차포 1문이었다. 그러나 주행성능은 최고속도가 포장도로에서조차 시속 13km, 연비가 리터당 38m에 불과한 한심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 전차의 주행기구도 포르쉐가 매우 좋아하던 하이브리드 방식이었다.
히틀러는 <마우스>를 150대 발주했지만, 좀 어이없게도 이 발주는 V1호차가 완성되기도 전인 1943년 10월 취소되어 버렸다. 결국 <마우스>는 두 시제차만 완성된 채로 종전을 맞았다. 독일군은 <마우스> V2호차의 차체에 폭약을 설치, 자폭시켜 버렸지만, 포탑은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남았다. 소련군은 이 포탑을 회수, <마우스> V1의 차체에 결합해 본국으로 가져가 각종 실험에 사용했다. 오늘날 <마우스>는 러시아 쿠빙카 전차박물관에서 거대한 덩치로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포르쉐의 또다른 야심작인 <마우스> 초중전차. 양산도 되지 못한 채 현재는 박물관 신세다.
전후와 말년
종전 후인 1945년 11월, 포르쉐는 프랑스의 전후 재건을 위해 프랑스에 와서 폴크스바겐 설계 및 제작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와 자동차 업계의 견해 차이로 이는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었고, 그해 12월 15일, 그는 전쟁 범죄자로 몰려 20개월을 복역하게 되었다. 포르쉐는 독일군을 위해 무기를 제조한 것 이외에도, 범죄집단으로 규정된 나치당과 친위대 가입혐의, 그리고 자사의 공장에서 외국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가혹한 처우를 한 전쟁범죄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체포되었지만 6개월 만에 풀려난 아들이 보석금을 내는 등 구명 노력을 한 덕택에 그나마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1949년 포르쉐는 아들과 함께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신모델 포르쉐 356을 제조하며 포르쉐 사를 재건했다. 폴크스바겐 생산 때마다 로열티도 지급받던 그는 1951년 1월 30일 75세를 일기로 슈투트가르트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사후인 1996년 그는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99년에는 <금세기 자동차 엔지니어> 상을 받았다.
포르쉐는 분명 그런 상이 아깝지 않을 만큼 천재적인 자동차 기술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에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도왔다는 그림자는 분명히 있다. 더구나 권력자와의 친분을 이용해 군 전력에 그리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무기를 납품하려 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좋은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우리의 무기도입 과정은 과연 투명하게 진행되고 있는가? 현실성이 떨어지는 프로젝트에 낭비되는 예산은 없는가? 되돌아볼 일이다.
글: 이동훈 디펜스21+ 객원기자(enitel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