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3제국의 2인자 헤르만 괴링

이동훈 2015. 0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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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 그의 이름에서 뭐라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사치스럽고 탐욕스러운 성품에다 형편없는 지휘능력과 잔혹한 악행으로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그의 실체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그런 인물을 공군의, 아니 전군의 우두머리로 앉혀준 나치 독재정권이라는 시대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인품의 괴링의 성장기


 헤르만 빌헬름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웬만큼 아는 이들에게 그는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다. 엄청나게 비만한 몸매로 ‘제3제국에서 제일 무거운 군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웠고, 미군 병사들은 거친 군대 식사를 가리켜 ‘괴링의 엉덩이’로 불러댔다. 주업인 공군 총사령관 외에도 수십 개의 감투를 직접 썼고, 형편없는 작전 지휘 능력으로 독일 공군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이면에는 권력을 향한 불타는 욕망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전후 살아남은 나치의 고관 중 서열 2위로서,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도 나타나듯이 연합군 군인들까지 휘어잡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실체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괴링은 1893년 1월 12일 예비역 기병 장교이자 정치가였던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 했던 그는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고, 군복 입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등산을 즐기는 등 아웃도어 활동도 즐겼다. 그는 16살에 베를린 리히터펠데 사관후보생 학교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훗날 1946년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의 검사에 따르면, 괴링의 IQ는 무려 138이었다고 한다. 소위로 임관한 괴링은 1912년 프로이센 육군의 프린츠 빌헬름(제112) 연대에 배속되었고, 얼마 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괴링은 전선에서 불과 1.6km 떨어진 뮐하우젠에서 보병으로 복무했으나, 류마티즘에 걸려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회복 중이던 괴링은 친구인 브루노 뢰르처를 통해, 당시 새로이 창설 중이던 독일 육군 항공대를 알게 되고, 그곳으로의 전속을 희망하게 된다. 전속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근무 이탈까지 벌인 끝에, 괴링은 독일 육군 제5군 산하 제25야전비행대대에 뢰르처와 함께 관측수로 배속 받는다. 그는 이곳에서의 활약으로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조종사 교육을 받고 제5 전투비행대대로 배속되었으나, 전투 중 부상당해 거의 1년을 쉬어야 했다. 완치된 후 그는 총 22대의 적기를 격추시켰고, 이 공로로 체링 사자 검장, 프리드리히 훈장, 호헨촐레른 검 3등장, 푸르 르 메리트 훈장 등 많은 고급 훈장을 수여받는다. 종전 직전인 1918년 7월에는 유명한 에이스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소속부대였던 제1전투비행단의 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거만한 성품 때문에 평판은 별로였다고 전해진다.


나치당에 입당해 전간기 정치 투쟁에서 대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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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괴링과 카이텔, 히믈러, 히틀러. 나치 독일에서 괴링은 사실상의 서열 2위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인해 공군의 보유가 금지되었다. 그래서 괴링은 전후 제대한 후 민간항공 업계에 들어가 조종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23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감화되어 나치당에 입당한다. 다른 많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독일 군인과 마찬가지로, 괴링 역시 평소에 ‘등 뒤의 비수’ 이론을 믿고 있었다. ‘등 뒤의 비수’란, 전선을 파리 코앞까지 몰고 갔던 독일은 군사력이 모자라서 진 것이 아니라, 후방전선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자들과 유태인, 공화주의자들의 반역 행위로 패배했다는 억지 주장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그의 나치당 입당의 한 원인이 되었다. 괴링의 자질을 높이 산 히틀러는 그에게 돌격대(SA, 나치당 초기에 결성된 정치 폭력조직) 최고사령관의 지위를 주었다. 괴링은 후일 돌격대 집단지도자(육군 중장에 상당)의 계급을 얻고, 1945년까지 돌격대원 신분을 유지했다. 괴링의 아내 카린도 히틀러를 좋아해, 괴링, 히틀러, 루돌프 헤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에른스트 룀 등 나치당 고관들의 모임을 곧잘 주선했다. 괴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돌격대의 병력을 1개 사단급에 해당하는 11,000명으로 늘렸고, 히틀러는 그런 괴링의 수완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해 “돌격대를 제대로 운영한 유일한 인물” 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히틀러는 괴링이 이끄는 돌격대를 앞세우고 뮌헨을 비롯한 독일 각지에서 집회를 벌이며 정적들을 쳐부쉈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자 하던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벌인 로마 진군의 성공을 보고, 이를 모방해 1923년 11월 8~9일에 걸쳐 뮌헨 맥주홀 쿠데타를 벌였으나 실패로 끝난다. 14명의 나치 당원과 4명의 경찰관이 사망한 이 쿠데타에서, 히틀러와 함께 육군성으로 가던 괴링도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 요인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괴링은 아내 카린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도망쳐 그곳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 진통 목적으로 처방받은 모르핀에 중독되었다. 괴링은 한동안 외국에서 도피를 계속하다가, 1927년 사면령이 내려지자 독일로 돌아온다. 한편, 그 동안 나치당은 재건되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한 히틀러가 1924년 12월 출소했고, 돌격대 조직도 재건되었다. 그리고 1925년에는 히틀러 경호를 위한 돌격대의 하부조직으로서 친위대(SS)도 창설되었다. 나치당의 당원 수는 1925년 2만7,000명에서 1928년에는 10만8,000명, 1929년에는 17만8,000명으로 폭증했다. 1928년 5월 독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491개의 국회 의석 중 12개를 획득했는데, 이 중에는 괴링도 있었다. 그는 바이에른 주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29년의 세계 경제 대공황은 재건되어 가던 독일 경제에는 엄청난 악재였지만, 독일인의 빈곤과 상처입은 자존심을 이용해 세를 불리던 나치당에는 엄청난 호재였다. 나치당은 1930년 총선에서 무려 107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이 와중에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벌어졌다. 세간에는 이 사건의 주범이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판 데어 루베라고 알려졌지만, 윌리엄 샤이러 등 여러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나치당의 자작극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전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독일 육군의 프란츠 할더 대장은 “1942년 히틀러의 생일 파티 때 괴링은 자신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밝힌 바 있다” 고 증언했다. 그러나 괴링은 할더 대장의 증언 내용을 부인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취임하자, 괴링은 정무장관, 프로이센 주정부 내무부 장관, 항공교통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괴링은 1933년 11월 30일 프로이센 경찰부대를 창설했는데, 이 조직이 훗날의 비밀국가경찰, 즉 게슈타포가 된다. 당시 히틀러는 무려 200만 명 이상의 대원을 보유한 돌격대가 쿠데타를 벌일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게슈타포의 청장을 겸직하던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심복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그리고 괴링과 함께 돌격대 주요 간부 숙청작전을 기획했다. 1934년 6월 29일 실행된 이 작전이 바로 <장검의 밤>이었다. 이 때 돌격대 최고사령관 에른스트 룀을 포함해 85명의 돌격대 간부가 친위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돌격대 간부 체포 및 살해가 불법적으로 자행되었음을 인정했으나, 돌격대가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었다며 자신을 옹호했다.


 독일 공군의 총수로 재무장과 합병에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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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독일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자, 괴링은 항공부 장관에 취임, 신생 독일 공군을 이끌게 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신속한 재무장을 위해 괴링을 재무장 4개년 계획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괴링은 노동부 및 농업부와 손을 잡고 이 계획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1937년 7월에는 그의 이름을 따 창립된 국영 제철기업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사>의 사장으로 취임, 민간 기업을 능가하는 양의 철강생산 작업을 감독했다.
  1938년, 그는 이른바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에 개입했다. 이 사건은 괴링이 육군성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의 새 아내가 창녀라고 주장했으며, 친위대의 하이드리히 역시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가 동성연애자라고 주장함으로서 촉발되었다. 이로서 폰 블롬베르크와 폰 프리치 두 사람이 사임하자, 히틀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취임, 독일군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괴링은 재무장 4개년 계획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철광석과 숙련 노동자가 풍부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고 싶어했다. 히틀러 역시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기에 괴링의 이런 생각을 동조하고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히틀러는 1938년 2월 12일 오스트리아 수상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평화롭게 합병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으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겠다고 협박했다. 괴링 역시 슈슈니크와 오스트리아 국가원수 빌헬름 미클라스에게 전화를 걸어 슈슈니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독일군을 투입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는 것은 물론,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동원해 오스트리아 국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결국 슈슈니크는 3월 11일에 사임했고, 그 다음날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영내로 저항 없이 진격했다.
   같은 해 7월, 괴링은 영국 정부 요인들을 만나서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은 이를 수락했다. 괴링과 영국 정부 요인들의 회담을 통해 향후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대한 영-독간 협정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괴링은 헝가리 정부와도 접촉해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시 헝가리 정부가 맡을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여러 차례 만나 1938년 9월 29일,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한다는 내용의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졸전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날렸다. 그리고 같은 날, 국회의사당 연설을 통해 자신이 유고될 경우 괴링을 후계자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괴링이 이끄는 독일 공군의 항공부대와 공수부대는 서부전선 독일군의 대승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폴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 독일 공군은 연전연승했다. 프랑스 패망 이후 히틀러는 괴링에게 철십자 대장(괴링 단 한 사람에게만 수여되었다)을 수여하고, 그를 대독일 제국 원수에 임명했다. 괴링에게만 부여된 이 계급은 독일군의 모든 원수 중 최선임 계급으로, 이로서 그는 독일군 전군의 최고위 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독일 공군은 1940년 여름에 진행된 영국 전투, 즉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첫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영국 본토 상륙작전에 앞서 영국의 공군력을 말소시킬 목적으로 진행된 영국 전투에서, 영국 공군은 상상 이상으로 완강히 저항했다. 독일 공군은 전술기의 항속력 부족, 작전목표의 분산, 그리고 현대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괴링의 졸렬한 지휘 등 여러 악재가 겹친 끝에 결국 영국 공군의 괴멸에 실패했다.
   독일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롯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다. 독일 공군은 불과 1개월 내에 수천 대의 소련 공군기를 격파,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소련 정복이 가능하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 7월 당시 독일 공군이 동원할 수 있는 항공기는 1,000대에 불과했고, 독일 동부군의 인명 손실은 21만 3천명이나 되었다. 결국 독일군은 손실 누적, 소련군의 신속한 병력 증원과 반격, 혹한기의 추위와 그에 대한 대비 부실 등으로 그 해 겨울 모스크바를 코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다.
   이듬해인 1942년, 히틀러는 공세의 주력을 동부전선 남부 방면에 집중시켰다. 카프카즈 유전지대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카프카즈 유전지대로 가는 길목에는 소련 유수의 공업도시인 스탈린그라드가 있었다. 1942년 8월23일부터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은 28만 5천명의 병력으로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입성, 소련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 도시에 발이 묶인 독일 제6군을 포위, 12월 말에 포위망을 완성했다. 아직 탈출 및 후퇴 가능성이 있었지만, 괴링은 공군을 동원해 스탈린그라드 시내의 독일군에게 매일 300톤씩의 물자를 항공보급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약속에 넘어간 히틀러는 제6군의 퇴각을 불허했다. 그러나 물자보급량이 일간 120톤을 넘어간 날은 없었고, 심할 때는 하루에 단 1톤도 보급을 못 해준 날도 있었다. 결국 1943년 2월, 9만 1천 명으로 줄어든 제6군은 소련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연합군의 독일 본토 폭격은 갈수록 그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1942년 5월 30일에는 영국군이 독일 도시 쾰른에 최초의 1,000대 폭격을 시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주영 미 육군 항공군 폭격기들도 독일 본토 폭격을 시작했다. 연합군 전투기들 역시 항속거리 증대노력 및 신기종 투입을 통해 독일 본토 상공에서도 전투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석유생산시설 및 교통시설 등 주요 시설에 대한 연합군의 맹렬한 폭격으로, 1944년 하반기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아울러 독일 영공을 지켜내지 못한 괴링의 평판도 크게 하락, 히틀러가 주요 회의 때 부르지도 않는 일이 갈수록 많아졌다. 1944년 당시 독일 공군의 실추된 위상은 그해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양측 전력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당시 연합 공군의 항공기 보유대수는 1만1,000대. 그러나 노르망디 지역에 독일 공군이 배치한 항공기는 300여 대에 불과했다.


 종전,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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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재판정에서의 괴링


  독일이 오늘 내일 하던 1945년 4월, 소련군은 베를린을 향해 맹진하고 있었다.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을 기점으로 많은 나치의 고관들이 히틀러의 곁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그 중에는 괴링도 포함되어 있었다. 괴링이 오버잘츠부르크로 피신한 4월 22일, 히틀러는 중대한 공식 발표를 했다. 독일은 이 전쟁에서 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베를린에 남아 있다가 자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공군참모총장 카를 콜러 장군을 통해 이 발표를 전해들은 괴링은 과거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했던 히틀러의 명령을 생각해냈다. 그 명령에서는 히틀러가 행동의 자유를 잃게 될 경우 괴링이 히틀러의 대리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콜러 및 한스 라머스(수상 직속 정무장관)와 이 문제를 논의한 괴링은, 히틀러는 현재 베를린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므로 국정 운영을 할 능력이 없고, 따라서 자신이 히틀러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4월 23일, 괴링은 히틀러에게 국가 원수 자리를 넘겨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날 22시까지 답장이 없을 경우, 히틀러가 행동의 자유를 잃은 것으로 간주, 자신이 독일 국가 원수직을 인계받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이 전보는 괴링의 정적 마르틴 보르만에 의해 감청되었다. 보르만은 이 전보 내용을 히틀러에게 보여주면서, 괴링은 반역자이며, 전보는 히틀러가 국가 원수직을 내놓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4월 25일 괴링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장 사임하지 않으면 반역죄로 사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괴링을 모든 공직에서 파면시키고, 괴링과 그의 참모진, 라머스를 반역죄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보르만을 통해 괴링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히틀러는 유언장에서 괴링을 후계자로 지명했던 과거의 명령을 취소하고, 해군 총사령관이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자신의 뒤를 이을 독일 대통령이자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한 후, 4월 30일에 아내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마우테른도르프로 피신했던 괴링은 5월 5일 독일 공군 부대에 의해 구조된 후, 미군 전선으로 가서 항복했다.
  괴링은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마약을 끊고, 체중도 무려 27kg이나 감량한 후 1945년 11월부터 시작된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했다. 괴링은 뉘른베르크의 나치 피고인 중에서도 대통령 카를 되니츠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고관이었다.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는 피고인들에게 4가지의 죄를 물었다. 침략 전쟁의 공동 모의, 침략 전쟁의 수행, 전쟁 범죄, 비인도적 행위가 그것이었다. 괴링은 4가지 항목 모두 유죄로 판결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 전날인 1946년 10월 15일, 그는 밀반입한 청산가리 캡슐로 자살했다. 그가 캡슐을 어떤 식으로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언변에 감화된 미군 병사들이 반입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괴링의 유해는 화장되어 산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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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괴링. 그의 시신은 화장 후 산골되어 무덤이 없다


 나치 독재정권의 축약판


 괴링의 행보를 자세히 뜯어보면, 나치 시대 독일의 속내를 알 수 있다. 그의 성장배경, 그리고 나치당 입당 과정과 그 이후 정치 투쟁에서의 활약상을 보면 나치당이 무엇을 표방했고 어떤 인물을 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치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등 뒤의 비수’로 상징되는 독일 내 공산주의자와 유태인들에 의해 패한 것이라고 선전해댔고, 괴링으로 대표되는 독일 내의 보수 기득권층은 그 가공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치에 힘을 실어주어 나치당과 히틀러의 일당 독재체제를 열어 주었던 것이다. 스스로가 최고사령관을 맡았던 돌격대조차도 <장검의 밤>을 통해 가차 없이 숙청해 버린 데서는 당시 극도로 혼란했던 독일의 정치 상황을 알 수 있다.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히틀러를 제거하고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제2인자들의 암투가 끊임없이 횡행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암투는 히틀러 자살 직전과 직후 다시 표면으로 드러났다.
   공군의 총수가 된 후 그의 행보를 보면, 독일 국방군의 비합리적인 운영 실태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육군과 해군, 친위대 등 타군에 결코 항공자산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군 본연의 임무인 항공작전과는 별로 상관도 없는 공수부대를 공군에 끌어오고, 아예 자신의 이름을 딴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을 공군 내에 창설하기도 하는 등 엄청난 통솔의 외도를 저질렀다. 전황이 궁지에 몰렸음에도 폼은 나지만 쓸데없는 신병기 개발로 귀중한 자원을 탕진했고, 현대 항공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위기의 상황에서 효과적인 지휘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히틀러가 죽기 직전까지 독일 공군, 아니 전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남아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전간기 정치투쟁기에 히틀러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정치 동지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히틀러는 그의 전횡을 눈감아주었고, 이는 독일의 패배에 상당 부분 일조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담은 결코 나치 시대 독일의 전유물이 아니다. 독재와 비합리가 판치는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당장 우리만 해도 박정희 정권 말기 경호실장 차지철이 경호업무와 상관없는 미사일 부대와 포병 부대를 경비단에 편입시키려고 하지 않았는가. 괴링을 단지 70년 전에 살았던 우스꽝스러운 군인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이동훈 객원기자(enitel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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