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의 군사적 대결의 역사와 군의 성격 비교
중국과 대만은 사실상의 통일로 가고 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두나라는 분단된 상태로 대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인민해방군과 중화민국군은 사실 서로 깊게 역사적 관계로 얽혀있다. 두 군사세력은 과거 모두 쑨원(孫文)이 세운 황포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지휘체계를 확립했고, 한때 같은 소속으로 함께 일본제국과 싸웠던 전적도 있다. 이처럼 남북한과 달리 중국 대만은 분단상태에 있음에도 다른 역사를 갖고 있다. 먼저 중국-대만의 군사적 대결의 역사와 서로 다른 성격을 보이는 군을 살펴보고 마찬가지로 비교적 관점에서 남북한 군의 성격을 두 번에 걸쳐 다룬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의 당군(黨軍)이다. 과거 국민당의 지휘 하에 국민혁명군 소속으로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편제된 적이 있으나 정치적으로 현재까지도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당군으로서의 성격을 잃지 않았다. 반면에 대만의 군대인 중화민국군은 초기 대륙에서 쫓겨온 장제스와 그가 이끄는 국민당의 당군 성격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후에 대만이 민주화되고 다당제가 인정되면서 민진당 소속인 천수이볜(陳水扁)이 대만 총통에 취임한 이후 명실상부한 국군의 성격으로 탈바꿈했다.
중국의 국부 쑨원
신해혁명과 국공합작,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중화인민공화국(대륙 중국)과 중화민국(대만) 모두가 국부로 칭하는 쑨원은 1911년 신해혁명(제 1혁명)을 진행할 때 청 왕조를 타도할 무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쑨원은 자신이 이끄는 남부의 혁명군보다 북부의 북양군벌, 즉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군사력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사실 청조를 멸망시킨 군사력은 크게 남부의 혁명군과 북부의 북양군벌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혁명군은 오합지졸인데다 각 계파간 연계도 잘 되지 않으며 탄약과 기타 장비에서도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군사력의 열세는 결국 청 왕조를 타도한 뒤에 중화민국의 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실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대총통이었던 쑨원은 제2대 대총통이자 중화민국의 제1대 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기는 대신 민주적 조건들을 요구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이를 모조리 무시했다.
이에 쑨원은 쑹자오런(宋敎仁)과 함께 1912년 혁명파를 재조직해 국민당을 창당했다. 그 후 쑨원은 같은 해 난징에 다시금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인민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모아 반격에 나서 제 2혁명을 시도했으나, 위안스카이에게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진압 당했다.이후 위안스카이는 중국판 을사조약인 21개조 요구를 수용하고 일본의 지지를 받아 결국 1916년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직위에 오른다. 이는 제 3혁명인 5·4 운동을 야기하게 되고 결국 쑨원은 현재까지 정당으로서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국민당을 조직하게 된다. 5·4 운동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자극받은 중국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1921년 천두슈(陳獨秀)가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을 설립한다. 이때 마오쩌둥을 비롯한 13인의 중국인과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서 파견된 2명의 외국인이 발기인이었으므로 이들은 볼셰비즘과 소련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게 된다.
한편 여러 뼈아픈 경험을 통해 쑨원은 자신의 군사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기에 소련에서 특사 마링(본명 : Hendricus Josephus Franciscus Marie Sneevliet, Maring)이 찾아왔다. 소련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외몽골, 동청 철도 문제 등의 외교 현안에서 대해서 당시 베이징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우페이푸(吳佩孚)보다는 쑨원이 그들에게 유화적임을 인지했고, 쑨원 역시 볼셰비키식의 개혁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 형식을 통한 연합전선을 받아들였다. 이에 국민당은 공산당원의 입당을 허용하고, 선전을 강화하는 '개진(改進)'을 단행했다.
1924년 1월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제 1차 국공합작이 천명되었고, 코민테른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으로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과 공산당간 합작의 결과였는데, 이 학교가 배출한 군사간부들을 주축으로 국민혁명군이 조직되며 교장은 후일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는 장제스(蔣介石)가 맡았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양측에 군사지도자를 배출한 것은 물론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이 학교출신들이 중요요직에 많이 자리를 잡았다. 국공내전 기간에 이 학교 출신 부대장들이 서로 반대편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충칭에서 회담을 하는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이 회담 결렬로 국공내전이 본격화한다.
국민당군에서 중화민국군으로, 대만군의 변천
대만군의 정식 이름은 '중화민국 국군'으로 처음에는 '국민혁명군'이였으며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의 군대였기 때문에 줄여서 '국민당군', '국민군', '국부군(國府軍)'이라고도 불렸다. 1947년 중화민국 헌법이 제정된 뒤에 '중화민국 국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냉전 당시에는 중화민국과 수교한 나라들에 한해서 '중국군'이라고 불리웠고 반대로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에서는 ‘대만군’이라고 불렸으나 중화민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오늘날은 세계적으로 '대만군'이라 통칭되고 있다. 중화민국 안에서는 '국군'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화민국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중국 언론 등에서는 '타이완군'(臺軍)이라고 하며 대만 지역의 민병대나 의용군 등의 준군사조직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화민국군의 전신인 국민혁명군은 쑨원이 1925년 당시 중국을 자국편으로 끌어들여 제국주의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소련의 인적, 물적 지원으로 세워진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출해 낸 장교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군대이다. 당시 중화민국은 1932년 3월1일 군의 최고 통수부로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장제스를 위원장으로, 7명의 주요 군벌 수장들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군사위원회 산하에는 참모부와 정치부, 군령부, 군정부, 군훈부 그리고 모든 육해공군 부대가 있었다. 초기의 국민혁명군은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 사상을 교육받았으나 동시에 소련 고문단에 의해 훈련을 받았고 소련식 무기로 무장했으며 소련군의 군제를 모방하였다. 이들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표방했으나 국민정부는 선거에 의해 만들어진 정부가 아닌데다 제도적으로도 일당독재에다 당이 국가에 우선했고 당군인 소련군을 모방해 조직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해서 국군이 아니라 국민당에 예속된 당군이었다. 이 점은 현재의 인민해방군도 마찬가지이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였고, 베이징을 지배하고 있던 군벌 세력을 정리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문제는 군벌세력들이 투항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국민혁명군에 형식적으로는 편입시켰으나 실제 투항한 군벌세력은 예전과 명목상 국민정부에 속한다는 것만 내세웠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각지를 할거하면서 자기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의 홍군 역시 1937년 8월 제 2차 국공합작이 결성된 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편제되어 일본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1945년 8월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이 개최되고 같은 해 10월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뜻을 같이하고 의견을 도출해냈다. 그러나 1946년 6월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홍군에게 공격을 감행했고, 공산당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조직을 정비하고 군대를 통합 재편하여 1947년 기존의 군사력을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한 뒤 투쟁을 계속한다. 한편, 같은 해 12월 중화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국민당 정권이 중화민국으로 정식으로 바뀌자 국민혁명군은 중화민국 국군(國軍)으로 재편된다. 그러나 1949년 중화민국 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패하고 타이완으로 쫓겨나는데 이를 국부천대라고 한다.
'본토수복'에서 '대만방어'로 역할이 전향되어가면서 병력을 감축하고 있는 대만군
1949년부터 장제스는 타이완 성, 펑후 제도, 진먼 현, 마쭈 열도에 계엄령을 선포해 군정을 실시한다. 이후 중국 국민당은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모두 장악한 실질적인 독재 정당으로서 군림하였다. 그러나 후일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1987년 7월 38년만에 계엄령을 해제했고 후임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취임 직후인 1989년 1월'정당설립에 관한 인민단체법’을 공표해 복수정당제가 실질적으로 도입되면서 대만의 정치체제는 대전환을 맞게 된다.
리덩후이는 중국공산당을 '반란집단'이라고 규정하던 헌법의 임시조항을 폐지함으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을 적대국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내에서 본토수복이나 대륙광복 등의 구호가 사라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동시에 국가보안의 틀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민간교류를 묵인하는 방법으로 양안 교류가 보장되었다. 리덩후이는 '국가통일강령'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헌법의 임시조항 폐지로 인해 총통에게 부여되었던 독재대권도 사라졌다. 이는 리덩후이 체제에서 가장 뚜렷하게 변화된 상징적인 조치였다. 계엄령 해제에 이어 국민당 일당독재를 보장하던 헌법이 수정된 것이다.
국민당 일당독재의 정치체제가 대전환을 맞이하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국민당 원로 세력들이 1990년 사법원장인 린양강(林洋港)과 장제스의 차남 장웨이궈(蔣緯國)를 각각 총통과 부총통 후보로 내세워 리덩후이에게 맞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1991년 12월 국민대표대회 선거가 실시되자 대만이 중국과는 별개의 주권국가인 '대만 공화국'이며 UN에 독립국 지위로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민진당이 161개 의석중 50석을 차지함으로서 국부천대 이후 국민당이 독주하던 대만의 정치체제를 동요시킨다. 당시는 대만인들도 국내적으로 민주화 욕구와 의지가 강화되던 시절이었는데, 이런 흐름을 타고 리덩후이는 1993년에 보수 군부세력을 대표하는 하오보춘(郝栢村) 행정원장마저 사퇴시킴으로서 국민당 원로 세력들을 대부분 축출한다. 이와 더불어 대륙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총통실 자문기관으로 국가통일위원회, 행정원 산하에 대륙위원회를 각각 설치하였고, 민간 차원에서 해협교류기금회를 설립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후 2000년 3월에 실시된 제 10대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후보가 당선되면서 국민당의 일당독재가 붕괴되었고, 비록 다음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에게 다시 정권을 빼앗겼지만, 이미 한번 여당과 야당이 바뀌어 서로 경쟁하는 정치체제가 성립된 것만 봐도 기존 계엄체제의 대만정권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하겠다.
계엄령의 해제와 헌정질서에의 복귀는 국가행정이 당정에서 국정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다당제의 공식적인 인정과 국민당이 아닌 민진당 세력의 총통취임 등의 사건들은 형식과 실질 양면에서 모두 이 시기부터 중화민국군은 대륙수복을 기치로 내세우는 국민당의 당군 성격에서 대만이라는 영토를 통치하는 국가정부에 소속된 국가군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고 판단되는 근거가 된다.
1927년 중국공농홍군으로 조직돼 적군, 홍군 등으로 불리다 1947년 10월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된 중국군
중국인민해방군- 모든 무장역량은 당의 영도에 따른다
현 중국군은 1927년 8월 1일 창군 당시에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으며 이후 1946년 6월까지는 '적군'(赤軍)이나 '홍군'(紅軍)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중일전쟁 기간 동안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국민혁명군 산하 '팔로군'(국민혁명군 제8로군)과 '신사군'(국민혁명군 육군 신편제4군)으로 편제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팔로군은 핵심근거지를 옌안(延安)으로 하고 있었는데 비해,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채 화중-화남에서 활동하던 신사군은 공산계열이기는 하지만 마오쩌둥의 세력과는 성격과 주축세력도 달랐고 노선 차이로 서로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신사군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장제스에게 충성하지도 않는 상태였는데 이러던 중 1941년 환남사변(혹은 신사군 사건)을 통해 신사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공격을 받고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으며, 부대장 예팅(葉挺)은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신사군은 해체를 명령받게 된다. 이때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는 천이(陳毅)를 부대장, 류사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삼아 신사군을 구원·재편했으며, 이때부터 비로소 신사군은 마오쩌둥에게 복종하기 시작하여 국공내전 중 화동야전군으로 개편되었다.
공산계열의 양대 무장세력이 통합을 이룬 뒤 정치적으로도 점점 세력이 확장되던 마오쩌둥에게 두려움을 느끼던 장제스는 일방적으로 쌍십협정을 어기고 1946년 6월 공산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초기에 공산군은 괴멸 직전까지 몰렸으나, 조직을 정비해 공산계열 군사조직을 1947년 10월 인민해방군으로 통합·개칭한 뒤 끈질기게 투쟁하여 결국 장제스를 대만으로 몰아낸다.
한국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기 전까지 '중공군'이라고 많이 불렸고 중화민국군을 '중국군'이라고 불렀지만, 수교한 이후 '중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중공군이라는 표현을 비하 명칭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이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라는 정당의 군대이므로 중공군 즉 "'중국 공산당군'이라고 불러도 사실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도 현재는 '중국군'으로 많이 불리고 한국 내에서 '중공군'이라는 용어는 한국전쟁 때 개입한 중국 인민지원군만을 특정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들의 중국내 약칭은 '해방군'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을 통치하는 집권당 '중국공산당' 소속의 군대이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인민을 해방시키는 당군(黨軍)이다. 국가에 속한 군대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지와 권력자들의 압제수단이라는 마르크스적 이론에 근거하여, 어디까지나 인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일 뿐이라는 해석을 적용하여 당군을 지향한다. 사실상 일당독재체제이기 때문에 이들은 실질적으로 여타 국가의 국군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다당제 국가에서는 발생하기 힘든 구조이며 이는 조선노동당에 속해 있는 조선인민군도 마찬가지다.
1954년 중국 헌법은 국가기구로서 국방위원회를 두고 있었지만, 군 통수권은 국가주석에게 부여했다. 1975년과 1978년 헌법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주석에게 군의 통솔권이 주어졌고, '전국의 무장역량'은 당의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1982년 헌법에서는 국가의 중앙군사위원회가 군의 업무를 총괄하게 한 점이 주목된다. 1982년 헌법은 당의 중앙군사위원회와는 별도로 국가 기구 내부에 '전국의 무장역량'을 지도하는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또한 1982년 헌법에 의하면 국가의 중앙군사위원회는 주석책임제로 운영되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에서 선출되고 전인대 또는 전인대 상무위원회에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주석의 지명을 통해 부주석과 약간의 위원들로 구성되는 국가 중앙군사위원회는 당의 중앙군사위원회와 완전히 중복되기 때문에 현재 중국에서는 당군과 국군의 차이를 제도적으로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중국내 모든 무장세력은 중국 헌법 제3장 제4절“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가 전국 무장역량을 영도한다”는 규정에 의거 당의 명령과 영도에 복종한다.
헌법상 국가 전체의 무장역량을 중국공산당이 영도한다는 '이당영군'(以堂領軍) 체제는 현재에도 공고하며, 중국공산당과 일원화되어 있는 중국정부는 1949년 정권 수립 이후 당의 군 통수권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군 기관지인 해방군보는 2012년 3월 19일 사설을 통해“군대를 비당화, 비정치화, 국가화 하는 것은 잘못된 관점으로 결단코 막아야 한다”고 밝힌바 있다. 사설은 “당은 군대의 절대적 영도자이며 모든 부대는 중앙당의 지시에 따르며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지휘 한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중국군 통수권은 1925년 당 대회에서 마오쩌둥이“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銃杆子里出政權)라고 선언한 이후 줄곧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행사해왔다. 1959년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이 군권 행사를 시도하고 마오쩌둥의 노선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전례를 봐도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간섭하는 것이 중국에서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알 수 있다.
당이 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통제장치는 정치위원(약칭은 政委, 정치장교) 제도이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의 각급부대에는 모두 정치위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중국은 당 주석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겸임하고 있고 당의 일부인 정치부 소속의 정치위원이 군 조직에 통제와 감시를 가하기 때문에 마오쩌둥 시절부터 당은 군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하에 있는 당의 군대이며 통합군체제로서 중앙군사위에 인민해방군 4총부장(총참모장, 총정치부장, 총장비부장, 총후근부장)과 해군사령관 및 공군사령관과 제2포병사령관이 참여한다. 육군사령관은 없으며 군구사령관, 해군 및 공군사령관, 제2포병사령관, 무장경찰사령관으로 연결된다. 군구사령관 및 해군 및 공군사령관은 원칙적으로 당 중앙위원 또는 중앙위원 후보의 지위에 있다.
중국내 또 다른 주요 무장세력인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는 중국 인민해방군 휘하의 준군사조직으로서 소련(현재는 러시아)의 내무군, 또는 프랑스, 터키의 국가헌병과 유사한 조직이다. 즉 이들은 일반 국가의 헌병과 마찬가지로 군기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지만 민간 치안도 담당하며, 기본적으로 소련의 제도를 참고해 출범한 조직이다. 소속부터 공안은 국무원 산하의 공안부 소속이나, 무경은 무장경찰 총부라는 자체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 무경 총부는 중국 전체의 무장경찰력을 관할하며 상장(타국의 대장에 해당)급이 사령직을 맡는데, 무경 총부는 인민해방군의 한개 군구에 맞먹는 대조직이다.
대만이 독립선언을 할 경우 인민해방군 본대가 아니라 이들이 대만 점령의 선봉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중국이 대만의 독립선언을 순전히 "자국 내에 있는 불법적인 무장세력의 반란"으로 간주하여 경찰부대를 투입함으로서 법적으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률상으로도 병역법 제4조 “중국의 무장력은 중국 인민해방군 현역 부대와 예비역 부대, 중국 인민무장경찰부대, 그리고 민병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규정이 존재하고 있다.
상전벽해 수준의 무기체계 및 교리전략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인민해방군
양안관계와 양군관계, 그리고 하나의 중국
중국공산당은 1954년에 진먼도(金門島)에 포격을 가하며 제 1차 대만해협 위기를 일으켰고, 1958년에는 포격에 그치지 않고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제 2차 대만해협 위기를 야기한다. 또한 1996년 실시된 대만 역사상 최초의 직접선거를 통한 총통선거 당시 대만 독립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자 중국은 대만해협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여 대만을 위협하여 제 3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했고, 미국은 여기에 항공모함 전단 2개(니미츠 호와 인디펜던스 호)를 대만해협에 급파해 중국과 대치했다. 국민당 역시 대만으로 쫓겨난 이래 줄곧 본토수복을 부르짖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장제스는 대만군을 참전시키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북파공작부대와 같은 성격의 본토정찰대(本土偵察隊)를 양성해 운용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세월이 흘러 대만의 국민당이 민진당과 여당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입장이 되자, 오히려 중국 대륙과 상대적으로 관계가 양호해졌다. 중국 대륙과의 각종 우호협력 사업을 벌이거나 최종적으로 양안이 통일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등, 과거 사활을 걸고 이전투구를 벌이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념 아래 상대적으로 밀접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국민당이 말하는 '하나의 중국'에서 '중국'은 중화민국(대만)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말하는 '중국'은 당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차이는 있다.
양안의 군대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역할과 주 목적이 바뀌어 갔다. 중화민국군의 경우 최근 대만 내부의 주요 정책이 바뀌면서 그 역할이 '본토수복'에서 '대만방어'로 전향되어가면서 병력을 감축하고 있다. 2013년 홍중추(洪仲丘) 상병의 의문사를 계기로 2014년으로 예정되었던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면적 전환은 유보되었지만, 2014년부터 기존의 1년으로 규정된 군복무 기간을 4개월로 단축하고 모병제 전환 역시 백지화 된 것이 아니다.
본토수복 전략의 폐기 이후 대량 양성 및 유지중인 해병대를 적극 활용하여, 현재 중화민국군은 대만에 속한 도서지역의 방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군의 신속대응군화와 해공군 우선 육성, 비대칭전력 강화등을 통해 거대하지만 육군력 위주로 성장한 중국인민해방군의 상륙 및 점령작전 저지를 골자로 군사력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편, 중국인민해방군은 이러한 중화민국군의 교리에 맞서 취약점이었던 해군력과 공군력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만이 독립을 외치지만 않으면 군사적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최근 대만독립을 최주요정책으로 하는 민진당의 대두에 긴장감과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중국은 대만을 압도하는 국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전통적인 육군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미국, 그리고 대만을 군사적으로 상대하려면 해군과 공군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한 중국은 전략 핵잠수함(진급 핵잠), 항공모함(랴오닝 호), 함재기(J-15), 스텔스기(J-20, FC-31)는 물론 미사일 분야에도 성과를 올려 SLBM(쥐랑 시리즈), ICBM(둥펑 시리즈), 장거리 순항미사일(창젠 시리즈)의 개발 및 성능강화를 달성했다. 이는 과거 대포로 섬을 포격하고 목선으로 상륙을 시도하던 수준에서 상전벽해 수준의 무기체계 및 교리전략 변화를 이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최근 중국의 의욕적으로 진행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대만이 창립멤버 가입 신청을 했을 때, 명칭을 중화타이베이로 변경하지 않으면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양안관계가 앞으로도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1991년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에 가입할 때도 대만은 중화타이베이라는 명칭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대만이 국내외적으로 각오해야 했던 여러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륙이 주도하는 AIIB의 창립 멤버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을 때조차 중국은 이를 흔쾌히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것만 봐도 양안 사이에서 양군이 서로에게 겨눈 총구를 내려놓을 날은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글/사진 유원 인턴기자 bittersweet04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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