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조장하는 미 국가안보국(NSA)의 실체
미국 정보국이 임무에 소홀하여 2001년 9‧11 테러를 막지 못한 것일까? 국가안보국의 세계최대 도청감시 시스템인 에셜론은 왜 무용지물이었을까? 과연 미국의 안보 유지가 이 비밀 조직의 진정한 목적일까?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 모인 50여 개국 정상들은 미래 세대에 전쟁 없는 세상을 물려줄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유엔은 “국가 규모를 막론하고, 국가 권리는 평등하며, 평화 안에서 이웃 국가들과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회의를 미국에서 개최할 것을 주장했었다. 미국이 관대해서? 미국 정보국은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을 염탐하고 대표들이 자국 정부와 주고받는 메시지를 감시했다. 전신 회사들이 수집한 암호화된 전보를 장교들이 해독하여 미국 협상대표에 전달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 등 추축국 감시와 종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 동구권 국가 감시 및 도청을 위해 구축된 미국 정보국은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휘하로 재편성되었다. 1982년 미국 기자 제임스 뱀포드가 자신이 수행했던 임무를 기술한 <수수께끼의 왕국(The Puzzle Palace)>이 출간되기 전까지 NSA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1) 뱀포드는 정보국을 떠나 20년이 지난 시점에 발간한 저서 ‘비밀의 실체’(2)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NSA의 단면을 공개했다. 뱀포드에 따르면, NSA에 투입된 연간 예산은 70억 달러(3)에 달했고(위성 감시망 지원예산 제외), NSA는 CIA와 FBI의 요원을 합친 수를 넘는 6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4)
국제 사안들이 점차 전자 통신(초기에는 라디오, 이후에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다루어지면서, 메시지 감시가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NSA는 미국과 안보협정 ‘UKUSA’(신호 정보 수집을 위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정보 협정-편주)을 맺은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정보국이나 하부기관과 긴밀한 협력 관계 아래 ‘신호 정보’(사람에 의한 정보수집과 반대 개념)를 수집했다. 윌리엄 스투드먼 전 정보국장은 “정보국의 최초 설치 목적이었던 군사작전 지원과 점차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던 전자통신에 대한 전 지구적·통합적 접근, 이 두 가지가 NSA의 근간을 이루었다”(5)고 NSA의 역할을 요약했다.
고도로 정밀하고 강력한 NSA의 감시 시스템도 2001년 9월 11일 그 한계를 드러냈다. 최첨단 대미사일 방어 시스템도 정기노선 취항기를 이용한 공격에 무용지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신 감시 시스템도 정밀하게 조직된 테러 조직이 이용한 구닥다리 통신 수단(익명 ‘우체통’이나 보안이 철저한 중개 등)에는 어떠한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뱀포드는 “NSA는 정기적으로 인말새트(Inmarsat, 국제위성통화서비스)의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오사마 빈 라덴으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의 암호화되지 않은 통화를 도청해왔다”고 강조했다. “NSA는 종종 방문객들을 놀라게 해주려고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어머니의 통화를 들려주곤 했다. 오사마 빈 라덴도 미국이 자신의 통화를 도청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6)
전쟁 조장과 불안 조성이 목적
뱀포드는 미국의 전자 감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NSA는 미국을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며,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조장하고 다른 국가들의 ‘기본권’의 근간을 흔들 목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각국 정상들은 미국이 ‘철저하게 도청’하고 있는 유엔 내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을 논의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을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정치 폭력이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 이 분할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논의에 참여한 국가들에 엄청난 압력을 가했다. 특히 라이베리아, 아이티, 필리핀은 미국의 압력으로 최종 결정 하루 전날 입장을 번복했다. 당시 미국 측 안보 보좌관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은 자신의 일기에 “미국이 이들 국가에 가한 강압 수단은 파렴치에 가깝다”고 기록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 정보국은 소비에트 연방 정보국과 독일군 암호 해독을 놓고 속도전을 펼쳤다. 미국 정보국이 소비에트 연방 정보국을 크게 앞섰지만 그 이익이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1950년대 미국의 정찰기가 소비에트 연방 상공을 비행했고, 2001년 4월에는 중국 하이난에 똑같은 광경이 벌어졌다. 1980년대 후반, NSA는 소비에트 연방을 도청, 정찰기, 함대, 잠수함 등으로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미국 수뇌부는 1961년 쿠바 반(反)카스트로 침공에 실패한 후 기이한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뱀포드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전략은 쿠바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포 공격 작전’을 펼쳤고 이를 쿠바에 전가했다. 한 기밀 보고서는 “미국 신문에 공개된 희생자 명단은 정치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미국 시민들의 격분을 유발하는 데에 충분했다”고 서술했다. ‘노스우드 작전(Northwood Operation)’이란 작전명의 이 계획은 비행기 탈취와 마이애미, 워싱턴 폭탄 공격 등을 포함했다. 작전 준비 문건은 “쿠바 정부가 서양 국가들의 평화를 뒤흔드는 중대 위협이며 예측 불가능한 정부라는 이미지를 확실히 심어 주어야 한다”고 명백하게 밝혔다.(7)
케네디 정부는 노스우드 작전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남지나해 통킹만에서 노스우드 작전과 유사한 ‘사건’이 터지면서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정보국이 B-52 폭격기가 하루 할당량을 채울 수 있도록 표적의 소재를 파악하는 미국 정보국의 대대적인 작전에 가담하였다.
침묵이 강요된 리버티 함대 피격사건
NSA의 역사는 수시로 달라지는 미국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예는 ‘6일 전쟁’이라 불리는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이 NSA의 리버티 첩보함대를 공격한 사건일 것이다. 1967년 6월 8일, 순찰 중이던 리버티호를 6시간 동안 밀착 감시하던 이스라엘 군이 전투기와 어뢰정을 동원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미군 34명이 사망하고 17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정은 거의 전체가 파괴되었다. 구명보트는 바다에 내리자마자 가라앉아 버렸다. 이스라엘은 사건 직후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NSA가 이에 대한 반대 증거자료를 갖고 있었지만, 미국 정부는 이러한 해명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조사를 재개하지 않았다.
뱀포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공격하는 함대가 미국 함대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뱀포드에 따르면, 공격의 목적은 미국 첩보함대가 그 곳에서 고작 20km 떨어진 엘-아리샤라는 이집트의 한 마을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잔혹행위에 대한 정보 수집을 막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군대가 이곳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과 포로들을 결박한 채로 총살한 것이다. 미 국방부는 철저한 보도관제를 선언했고, 미 함대 선원들은 본 사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구속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 린든 존슨 당시 미 대통령은 “우방국들을 곤경에 빠뜨린 것은 아니므로, 함대가 침몰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여타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 여론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과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편 1975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지지해 뉴질랜드 국민들의 반발을 부추겼다. 미국의 전쟁 이용과 타국의 권리에 대해 변덕스러운 태도는 ‘소국’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국가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뉴질랜드 국민의 여론은 좀 더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원했으나 뉴질랜드 정보국은 지속적으로 미국 정보 시스템의 전초역할을 맡았다.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인의 대다수가 동티모르의 독립을 원한 반면, 뉴질랜드 정보국은 호주와 함께 인도네시아 정보국과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던 미국, 영국 정부를 위해 동티모르 국민을 감시하는 데에 일조했다.
UKUSA 회원국들 간 불평등 관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뉴질랜드 비밀정보국은 미국이 어떤 정보를 요구할 경우, 그 대가도 제대로 요구하지 못한 채, 심지어 이러한 정보 제공이 자국의 이익이나 정책에 반하는 경우에도 원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한편 회원국들은 우방 국가나 이웃 국가, 무역 파트너 국가들을 정탐하는 것은 각별한 관계, 즉 극도의 불안감으로 대변되는 국가 방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정보국도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셜론 조직망을 조사 하는 중 필자는 NSA로부터 매주 수천 개씩 도착하는 보고서를 다룬 뉴질랜드 정보국 요원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보고서에 나타난 표적은 미국 정부의 우선 사항과 우려 사항을 잘 반영했다. 예를 들어, 1990년대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로챈 통신 정보들이 텔레타이프에 쏟아졌다. 이 통신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는 빈 라덴을 포함한 ‘자유의 전사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수집된 통신이었다.
이곳 정보원들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태평양 연안권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테러리스트들을 추격한 것이 아니다. 정보원들은 장관 비서실, 경찰, 군, 야당, 비정부기구(NGO) 등 정치, 경제, 군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체계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이 지역의 모든 지역 기구, 무역 컨퍼런스, 유엔 산하 기구들이 철저한 감시 하에 놓였다.
정보원 중 한 명은 키리바시(Kiribati)섬(11) 감시 작전을 언급했다. 어업은 키리바시의 불안한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주요 경제 활동분야였다. 수년 간 미국 참치 어선의 밀렵행위를 참던 키리바시는 이 지역에서 어업 활동을 하는 대가로 세금을 내겠다는 소비에트 연방 기업을 찾게 되었다. 당시 냉전은 점차 해소되고 있었지만 미국 정보국에는 반(反)공산주의 경계령이 작동하고 있었다. 뉴질랜드 정보국은 키리바시가 수신하거나 송신하는 모든 통신을 감시하고 이를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은 이를 키리바시의 계획을 취소시키기 위한 외교 작전에 이용하였다. 이 사건이 세계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이 초소형 국가에는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뉴질랜드 정보원들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협상 당시 쏟아졌던 엄청난 양의 통신 정보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 1980년과 1990년 미국 대표와 유럽 대표는 GATT 협상을 위해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 뱀포드에 따르면, NSA는 1995년 미국-일본의 자동차 관세 협상 당시 도요타와 닛산의 고위 관리를 염탐하기 위해 스위스로 정보요원팀을 급파했다. 캐나다 정보원이었던 제인 쇼튼은 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던 당시 멕시코 대표단을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2차 대전 후 첩보행위는 유엔 설립 국가들이 강조하는 희망, 즉 국가 권력의 평등, 전쟁 없는 세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용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간첩행위는 국가 간 권력 불평등을 더욱 강화시켰을 뿐이다. NSA와 그 동맹국들은 폭군과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는 자신들의 영웅적 이미지에 흡족해 하고 있다. 이미지에 부합된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표적은 어떠한 위협도, 위험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정보 작전은 오히려 폭군을 지지하고 또 어떤 작전은 테러리즘을 부추기기 위한 작전들이었다. 신호 염탐에 열을 올린 국가들은 기만적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NSA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74호] 2014년 10월 30일
글 니키 헤이거:뉴질랜드 작가이자 연구원. 저서로 <시크릿 파워, 국제 스파이 네트워크에서 뉴질랜드의 역할>, <타인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과 뉴질랜드>(크레이그 포튼, 넬슨, 뉴질랜드, 1996년, 2011년) 등이 있다.
번역‧김수영 ksy_french@naver.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더 퍼즐 팰리스: 미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기관에 관한 보고서>, 휴튼 미플린, 보스톤, 1982년
(2) James Bamford, <바디 오브 시크릿. 냉전에서 21세기 초까지, 초특급 기밀기관 NSA 해부> 더블데이, 뉴욕, 2001년
(3) 2013년, 기밀에 부쳐지는 본 예산을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80억 달러(6월 6일), <워싱턴 포스트>는 108억 달러(8월 30일)로 예상했다.
(4) 2013년, 공식적인 수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예측 수치는 제각각 달랐다. <워싱턴 포스트>는 NSA가 35,000명, <포린 폴리시>는 35,000~55,000명을 고용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5) 기밀 문서에 수록된 1992년 4월 8일 직원들을 위한 고별 연설
(6) <바디 오크 시크릿>, p.410
(7) 위의 책 p.82
(8) 위의 책 p.226
(9) ‘동맹국 사이 첩보활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1년 7월호, 2001년 유럽 의회가 채택한 게하르 슈미트(Gerhard Schmid) 보고서 참조. www.europal.eu.int/
(10) <시크릿 파워. 국제 스파이 네트워크에서 뉴질랜드의 역할>, 크레이그 퍼튼 퍼블리싱, 넬슨, 뉴질랜드, 1996년
Philippe Rivière, ‘에셜론 시스템’, <마니에르 드 부아> 46호. ‘통신 혁명’, 1999년 7-8월
(11) 남태평양 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