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 현대인
영화정보
원제: The Matrix(1999년작)
감독: 워쇼스키 남매(라나 워쇼스키, 앤디 워쇼스키)
출연: 키아누 리브스(네오 역)
로렌스 피시번(모피어스 역)
캐리 앤 모스(트리니티 역)
조 판토리아노(사이퍼 역)
휴고 위빙(스미스 요원 역)
그러고 보니 벌써 15년이 지났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 <매트릭스>가 개봉되어 전 세계 극장가는 물론 대중문화계 전반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게 말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엄청난 인기 덕택에 극중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패션, 주인공들이 쓰는 휴대전화나 가구 등의 소품까지 덩달아 잘 팔렸다. 심지어는 일본의 에어소프트건 제작사인 <도쿄 마루이> 사에서도 주인공 <네오>가 극중에서 쓰던 M-16 소총의 전동 에어소프트건을 모터 업그레이드를 통해 새로이 내놓았을 정도니까.
그뿐이랴. 극중에 나온 다양한 철학적 사상과 기호를 제나름대로 해석한 이른바 <매트릭스 철학> 서적들도 여러 권 나왔다. 이 영화가 뛰어난 오락성으로 흥행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평론가들 입장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담은 작품이라는 증거였다. 이런 책 중에는 2014년 현재까지 팔리고 있는 것도 여럿 있다. 좋기는 해도 대중성이 없어 관련된 글도 별로 없는 ‘흙 속의 진주’, ‘평론의 처녀지’ 같은 영화라면 모를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대성공을 하고, 이미 수많은 걸출한 선배들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이 영화를 새삼 다루자니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개봉 후 1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봐도 결코 유치하거나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간 이루어진 기술의 발전에 견주어 볼 때, 영화 속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결국 실현되는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더욱 절박하게 드는 요즘이다. 그러한 문제 의식을 안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매트릭스> 3부작 중 1999년에 개봉된 1편만을 다루고 있다. 물론 원칙대로라면 2편과 3편까지도 모두 다루는 것이 옳겠지만, 이미 시리즈의 세계관과 주제 의식은 1편에서 확립되었고(이는 속편 제작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이, ‘단판승부’를 봐야 하는 대중문화 제작 환경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2편과 3편은 1편에서 보여주었던 주제 의식이 상당히 희석된 채, 오락성 위주로 연출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2편과 3편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세 주인공, 좌로부터 트리니티, 네오, 모피어스
기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
도입부는 작품 전체의 예고편이자 에피타이저 격이라고 할만하다. 여자 해커 <트리니티>와 경찰들, 그리고 정장과 선글래스 차림의 ‘요원’(agent)들 간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트리니티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맨손 격투 능력으로 남자 경찰들을 마구 때려눕히고 도망친다. 요원 중 우두머리 격인 스미스 요원은 공중전화박스 속으로 도망간 트리니티를 쓰레기 청소차로 들이받아버리려 하지만, 청소차가 충돌했을 때 이미 트리니티는 전화기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나서 본작의 주인공 <네오>가 나타난다. 그의 본명은 토머스 앤더슨으로, 소프트웨어 기업 메타코텍스 사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이지만, 또한 지하세계에서는 네오라고 불리우는 프로페셔널 해커이기도 하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컴퓨터에서 “너는 매트릭스에 잡혔다”라는 메시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나온 “흰 토끼를 쫓아라”라는 메시지에 따라, 흰 토끼 문신을 한 여성을 따라 클럽에 간다. 클럽에서 그는 트리니티를 만난다. 네오가 매트릭스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하자, 트리니티는 그 답을 곧 찾게 될 거라고 답한다.
다음날 네오의 직장에는 스미스 요원이 이끄는 요원들이 네오를 잡으러 온다. 국제 지명 수배자인 <모피어스>가 택배로 보내준 휴대전화를 통해 그 사실을 미리 안 네오는 모피어스의 지시에 따라 도망치려 하지만, 겁을 먹고 스미스 요원에게 잡힌다. 스미스 요원은 네오의 입을 봉하고 몸 속에 기계 벌레를 이식한다.
깜짝 놀란 네오가 깨어난 곳은 자신의 침대였다. 모피어스에게서 또 전화가 와 만나자고 했다. 트리니티를 비롯, 네오를 데리러 온 모피어스의 동료들은 네오의 몸에서 기계 벌레를 제거해준다. 스미스 요원을 만난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경악하는 네오. 네오 앞에 나타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에 대해 말해준다.
“매트릭스는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와 같은 거지.”
“어떤 진실이요?”
“네가 노예라는 진실!”
그러면서 모피어스는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내놓았다. 빨간 약은 진실을 알게 해주는 약, 파란 약은 진실을 모른 채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살아가게 하는 약이라고 했다. 빨간 약을 먹은 네오 앞에 갑자기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물이 가득한 인공 자궁 안에 몸에 전선이 연결된 채 누워 있는 자신이 보였다. 갑자기 왠 기계가 와서 전선 연결을 해제하고 그를 자궁 밖으로 배출해 버렸다. 자궁 밖으로 내던져진 네오는 모피어스의 군함인 <네부카드네자르> 호에 구조된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내민 빨간 약과 파란 약. 어쩌면 우리 역시 이 영화를 통해 동일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오가 알게 된 진실은 처참하리만치 가혹했다. 그가 이제까지 서기 1999년이라고 알고 있었던 현대는 알고보니 서기 2199년 정도의 어떤 시대. 21세기 초 인류는 인공지능을 발명해냈고, 그 인공지능이 이끄는 기계들은 인류 문명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했다. 위기감을 느낀 인류는 기계들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인류는 지구 환경을 파괴하여 기계들의 에너지 공급원인 태양광선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계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한 인류는 기계들을 위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전락했다. 대신 기계는 매트릭스라는 신경 상호작용 시뮬레이션을 사용해 인간들에게 20세기 후반과 비슷한 가상현실을 보여줌으로서 자신들이 구속당하고 착취당하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모피어스 혼자서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모피어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지만, 끝내 목숨을 잃은 선각자가 있었다. 매트릭스 내에 사는 예언자인 <오라클>은 그 선각자가 부활해 인류에게 승리를 안겨줄 거라고 말했다. 모피어스는 그 부활한 선각자가 네오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네오는 마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가 파일을 읽어들이듯 엄청난 속도로 기계와의 전쟁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나간다. 네오는 기계 세계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는 요원들과 센티넬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요원들은 매트릭스를 지키는, 일종의 백신 프로그램에 가까운 존재들로서, 매트릭스 내의 어떤 곳에라도 복제되고 이동할 수 있고, 어떤 인간도 그들을 이기지 못한 무적의 존재였지만, 그 힘은 매트릭스 내의 가상현실 속에서만 유효하다. 현실 세계에서 운용되는 기계들의 전투로봇 센티넬은 그런 한계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모피어스처럼 매트릭스를 빠져나와 저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을 맡고 있었다.
한편 저항 조직의 일원인 사이퍼는 남몰래 매트릭스에 접속해서 스미스 요원을 만나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진실을 알게 된 후 기계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지금의 신세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인공 자궁으로 되돌려 보내달라고 스미스 요원에게 요청한다. 그러자 스미스 요원은 매트릭스를 빠져나온 인간들의 안식처인 <시온>을 관리하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접근 암호를 그 반대급부로 요구한다. 그 암호는 모피어스만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이퍼는 모피어스를 스미스 요원에게 갖다 바치기로 마음 먹는다.
모피어스 일당은 네오가 정말 인류를 구할 구세주인지를 알기 위해 오라클을 만나러 간다.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있던 오라클은 네오의 관상과 손금을 본 다음, 이렇게 말한다.
“재능은 있지만, 다음 인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나.”
그리고 네오와 모피어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운명임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네오에게 있다고 말한다. 모피어스는 네오가 오라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 때 네오의 눈에 똑같이 생긴 검은 고양이가 두 번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기시감은 매트릭스 시스템 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였다. 얼마 안 있어 스미스 요원이 이끄는 요원과 경찰들이 모피어스 일당을 공격해 온다. 모피어스는 나머지 인원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혼자서 스미스 요원과 싸우다 포로가 된다. 사이퍼는 누구보다도 먼저 매트릭스에서 탈출한 후, 트리니티와 네오, 모피어스를 제외한 동료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네오도 죽이려는 찰나 아직 숨이 붙어 있던 동료 <탱크>의 손에 사이퍼는 사살당한다. 탱크는 살아남은 네오와 트리니티를 매트릭스에서 탈출시킨다. 그러나 스미스 요원에게 생포당한 모피어스는 탈출시킬 수 없었다.
스미스 요원은 모피어스의 두뇌를 해킹해 시온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암호를 알아내려 한다. 그 암호가 기계들의 손에 들어가면 시온은 끝장이었다. 모피어스를 죽이면 암호와 시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오라클의 예언을 떠올린 네오는 다시 매트릭스에 들어가 모피어스를 구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는 트리니티도 동행한다.
네오와 트리니티는 격전 끝에 스미스 요원에게서 모피어스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네오는 트리니티와 모피어스를 먼저 탈출시킨 후 자신은 남아서 스미스 요원과 결전을 벌인다.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자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 호에는 요원들이 보낸 센티넬 로봇들이 도착, 함내로 침입하고 있었다. 네부카드네자르 호에 탑재된 EMP 펄스 포를 쏘면 이들을 어렵잖게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오가 아직 매트릭스 내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걸 쓰면 네오의 생명을 유지하는 전자기기까지 망가져, 네오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네오는 스미스 요원과 싸우다가 결국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아 죽는다. 트리니티는 네오의 주검 앞에서 오라클에게서 들은 마지막 예언을 말한다. 트리니티는 ‘구세주’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것이 그 예언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죽어서는 안 돼.”
트리니티가 눈물을 흘리며 네오에게 키스한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네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한 네오의 눈에 보인 매트릭스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매트릭스가 보여주려던 가상현실 대신, 매트릭스의 내장과도 같은 코드 문자열이 보이게 되었다. 네오는 스미스 요원이 쏘는 총알을 멈추고, 그의 배를 온몸으로 관통해 죽여버린다. 그리고 매트릭스에서 탈출한다. 그의 탈출을 확인한 네부카드네자르 호에서도 EMP 펄스로 센티넬을 격퇴한다.
네오는 매트릭스에 돌아와 공중전화에 이런 말을 남긴다.
“...이 전화를 끊고, 이들에게 너희가 보여주지 않으려던 것을 보여주겠다. 너희가 없는 진짜 세계를. 규칙도 통제도 경계도 국경도 없는 세계를.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를. 그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알아서 하라구.”
그리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 날아가는 네오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검증된 스토리와 세련된 포장의 만남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기자의 졸필로 뭐라고 평하기는 실로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굳이 이 작품의 성격에 대해 한 문장으로 정의를 내려본다면, “산업 사회를 마감하고 정보화 사회로 들어가는 초입에, 그 동안 인류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신화와 사상을 버무려 넣으면서, 현대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고 미래 사회에 대한 경고를 보낸 작품”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사실 앞에서 길게 풀어쓰기는 했지만 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 라인은 의외로 별것이 없다. 크리스토퍼 보글러가 말한 <영웅신화>의 전형적인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세계에서 살고 있던 영웅이 스스로의 사명을 자각하고 특별한 세계에 뛰어들어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적을 물리치고 보물을 쟁취, 자신이 원래 속했던 평범한 세계로 돌아와 획득한 보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요지의 영웅신화적 스토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민족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이다. 그만큼 인간의 근원적 사고방식을 만족시키는 ‘검증된’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진부한’ 것이기도 하다.
다른 평을 보면 이 작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깨달음과 고행, 죽음과 부활을 다룬 신약성서의 4복음서 내용과 유사하다는 사람도 있고, 명작동화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스토리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심지어 원작자들도 흰토끼 문신녀, 그리고 모피어스의 대사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는 이 작품이 영웅신화적 스토리를 그만큼 노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진부하거나 유치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작품에 담긴 메시지의 무게가 워낙에 대단하고, 그 메시지를 상업성 있게 포장하는 방법 또한 매우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트리니티의 발차기를 공중 정지된 상태에서 360도 회전해 가며 보여준 것이나, 네오와 스미스 요원이 보여주는 총알 피하는 장면 등은 그야말로 SF 영화 특수촬영기술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만 하지만, 그 외에도 이 작품의 품격을 높이는 요소는 매우 많다.
등장하는 각종 소품들, 특히 주인공들의 의상을 보면, 미래적인 분위기와 중후함을 동시에 잡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메카닉 디자인으로 넘어가면 ‘초등학생도 대번에 따라 그릴 수 있을만큼’ 간결하고 무난하던 전통적 미국 SF 메카닉의 디자인과는 달리, 매우 자잘한 디테일과 기계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 있어 그만큼 기계적이고 무기질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일본식 SF 메카닉의 느낌이 강하다. 전투신으로 넘어가면 영락없이 중화권 액션 영화의 오마쥬다. 마치 무기상이라도 된 양 온 몸 가득 총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탄창이 다 빈 총은 미련없이 던져 버리고 새 총을 뽑아 쏘는 네오와 트리니티의 모습은 영락없이 <영웅본색> 속 주윤발의 그것이다. 격투 장면 역시 중국 무술 영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티가 난다. 그러고보니 훈련하는 네오가 배우는 무술도 대부분이 취권, 쿵푸, 태권도 등 동양무술 일색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이 영화를 매우 화려하고 세련되면서도, 경박해 보이지 않고 신선해 보이게 해준다.
스크린 속에서 만난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수많은 지식인들의 평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영화가 주는 철학적 메시지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정한 사상에만 집착하지 않고 여러 사상의 특징을 골라 따와 기가 막히게 융합시킨, 이른바 <컨버전스>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기자 역시 대학 시절 철학을 전공한 덕택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점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작품의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은 앞서도 말했듯이 영웅신화다. 철학 속 영웅신화 중에서 제일 비슷한 것을 찾자면 역시 앞서도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다. 아니, 네오는 아예 예수 그리스도의 오마쥬적인 존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둘 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인류를 구원하라는 사명을 어느날 갑자기 부여받았고, 그 사명을 실천하려 고행을 서슴지 않고, 결국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버렸으나 부활해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가. 게다가 영화 속 네오와 모피어스, 트리니티의 관계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말하는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완벽한 오마쥬이다.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트리니티의 이름 자체가 삼위일체라는 뜻의 영단어이다.
<매트릭스>도 결국은 미국 영화고, 미국을 포함한 구미는 기독교 문명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 작품의 세계관에는 도교와 불교 등 동양 사상의 그림자도 엄청나게 많이 느낄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모른다.”는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이 떠오른 것은 결코 기자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질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이 물질과 다르지 아니하며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과 의식도 모두 이와 같다.”는, 흔히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불교 <반야심경>의 구절까지 떠올리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런 말들이 떠오른 것은 영화 속 매트릭스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경험이 ‘가상현실’, 즉 모조리 ‘가짜’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매트릭스의 인공 자궁에 꼼짝 못하게 붙들려 기계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착취당하는 불쌍한 인생이어도, 매트릭스가 제공하는 ‘나비 꿈’ 안에서는 얼마든지 멋있고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매트릭스가 주는 달콤한 꿈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바에야, 그에게 현실의 불쌍한 상태는 완전히 무의미하지 않은가.
사이퍼의 표현을 빌자면 매트릭스 안에서는 고기를 먹어도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다. 매트릭스가 인간의 뇌에 고기의 미각적 자극을 전달해 주는 것일 뿐이다. 매트릭스가 주는 자극이 너무 완벽해서 인간의 뇌가 그것을 진짜와 구별하지 못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대로 공(기계가 주는 자극)과 색(진짜)의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부처는 그것을 깨달은 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듯이 영화 속 네오도 매트릭스가 모두 가짜이며 코드의 덩어리일 뿐임을 몸으로 깨달은 후, 매트릭스의 수호자이며 그 상징이라고까지 할 만한 존재인 스미스 요원을 죽이고, 매트릭스 내의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날아다니기까지 하는 신적인 존재로 탈바꿈하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는 물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도 누군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된 것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 여러분도 실제로는 매트릭스에 얽매여 가짜 자극에 농락당하고 있는 신세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의 존재의 이유와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 영화의 기본 설정들을 짚어나가기만 해도 이렇게까지 중요하고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들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정보화 혁명을 맞이한 현대 사회에 던지는 경고장
그런 거창한 실존적 물음까지 도달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가짜’ 자극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휘둘리며 살고 있다.
그 사실을 통렬하면서도 <매트릭스>와는 다른 코믹한 방식으로 파헤친 영화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볼까 한다. 지난 1997년 개봉한 <왝 더 독(Wag the Dog)>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 견학온 여학생을 성추행하다가 발각되자, 이를 덮고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유럽의 소국 알바니아와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 한 명의 미군도 알바니아에 싸우러 간 적이 없었다. 그 전쟁을 보도한 미국 TV의 뉴스 영상들은 모두 스튜디오에서 연출 하에 촬영한 가짜다. 심지어는 미국으로 운구되는 전사자의 관도 시신이 없는 빈 관이다. 하지만 이런 사기극에 속아넘어간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한다는 씁쓸한 엔딩으로 영화는 끝난다.
물론 현실에서 이 정도의 엄청난 사기극이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대국 또는 제3국의 반박 성명이나 반박 보도 정도로 충분히 논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화제가 되었던 여러 훈훈한 UCC 동영상들이 실은 시청자들의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조작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바퀴벌레는 한 마리가 보이면 실제로는 40마리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한 후 ‘참’으로 여기고 있는 것 중 진정한 ‘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사건을 직접 접한 사람들 사이에도 사건 내용에 대한 진술이 엇갈리는 판인데?
설령 이러한 의도적 조작이 없다고 해도, 모든 미디어는 편집 과정에서 사실의 ‘일부’ 내용이 필연적으로 잘려나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적절한 언론 통제가 가해지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의 확증편향적 습성이 더해질 경우, 우리는 진실로부터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대표되는 정보화 혁명을 맞이하여 산더미같은 정보에 치여 살며 거짓 정보와 진짜 정보의 구분이 매우 힘들어진 오늘날 더욱 더 진지하게 물어 봐야 하는 문제이다.
정보화 혁명은 인간 사회의 또다른 어두운 면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권력자의 감시와 사생활 침해이다. 영화 속 스미스 요원은 정보화 사회의 감시와 사생활 침해가 어떤 것인지를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매트릭스 속 어떤 사람에게도 빙의할 수 있으며, 어디라도 갈 수 있고, 무엇이라도 때려부술 수 있다. 이게 영화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전 미국 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NSA의 전자적 수단을 사용한 불법사찰 내용을 엮은 책인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를 보시기 바란다. 책의 제목대로, 골목마다 집집마다 깔린 네트워크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자행되는 감시와 사찰 앞에 <더 이상 숨을 곳은 없다>. 물론 그런 정보기관의 맹동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보기관이 합법적으로만 사찰한 적이 언제 있었나? 합법적으로만 사찰했다면 미국의 FBI나 구 소련의 KGB가 국가의 운영을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는 ‘그림자 정부’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정보화 혁명 시대의 개인들은 네트워크 상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노출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사회에 자신의 정보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 중 기본권인 건강과 생명까지도 저당잡히고 있다. 영화 속 매트릭스가 인간을 에너지원(극중 모피어스는 듀라셀 건전지로까지 비유한다) 삼아 돌아가듯이, 현대 사회 역시 개인의 건강과 생명을 상당 부분 희생시켜야 돌아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소리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독자들은 직장 생활 하면서 과로로 몸져 누워 본 적은 없었나? 동료 간의 불화로 스트레스 쌓여 속병 앓아 술담배로 푼 적은 없었나? 잊을 만 하면 언론매체의 지면을 장식하는 산업재해와 직업병 환자들은 또 어떤가? 기자 주변에는 40대 젊은 나이에 화실에서 과로로 유명을 달리한 만화가도 있다. 이쯤 되면 매트릭스가 영화 속에만 있다고 말하기가 점점 어렵게 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건강권과 생명권, 행복 추구권 등 인간의 추상적인 권리(아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권리라고 해야 더 와 닿을까?)를 추구하는 데 인색한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최근 급속히 발전이 진행되고 있는 가상현실 기술이야말로 매트릭스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구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매트릭스는 가상현실 기술의 엄청난 잠재력은 물론, 그것이 최악의 방향으로 사용될 때 불러오는 폐해를 가장 확실하게 경고한 영화이기도 하다.
과거의 가상현실은 컴퓨터를 이용해 시청각적 자극만을 전달했지만, 현재는 햅틱 기술을 채용해 촉각적 자극도 제공할 수 있도록 발전했다. 덕분에 가상현실 시스템은 게임을 비롯해 의료, 설계, 엔지니어링, 군사훈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방안이 모색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장소를 경험하는 텔레프레전스, 즉 원격 현실감 기기로서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물론 아직은 실제 환경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가상현실 세계를 재현하기에는 상당한 기술적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기술발전에 의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현실과 지극히 유사한, 아니 어쩌면 현실을 능가하는 가상현실 세계의 구현은 가능과 불가능이 아닌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얘기다.
최첨단 고글형 가상현실 시스템 <리프트>의 개발자 버전을 이미 출시한 데 이어, 올해 말 그 상용버전을 내놓을 예정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기업인 오큘러스 VR 사의 설립자인 파머 럭키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는 “가상현실은 3D 프린팅 등의 여타 혁신 기술과는 달리 어떻게 세상을 바꿔놓을지가 분명한 기술.”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과학 월간지 <포퓰러사이언스>를 통해 “궁극의 가상현실 기술은 인간의 신경계와 시스템을 곧바로 연결해 주변장치 없이도 가상현실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가상현실 속에서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생활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가상세계는 현실보다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세계가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미 그는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현실의 현실 잠식’을 ‘예정된 미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가상현실 기술은 ‘실패한 인생들의 현실 도피처’ 노릇을 그 어떤 마약이나 알콜보다도 훌륭하게 해낼지도 모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기자가 철학을 전공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영국의 문학평론가 콜린 윌슨이 쓴 <아웃사이더>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다. 그 책에서는 아웃사이더를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시각에서, 너무 많이, 너무 깊이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결코 사회의 주류집단에 돌아갈 수 없는 국외자로 정의하고 있었다. 윌슨은 그 책에서 실존했던 아웃사이더, 그리고 픽션 속 아웃사이더들의 일생을 정리하고 평론했다. 그는 아웃사이더야 말로 인간 존재의 의의와 진실한 삶을 찾는 탐구의 시작점이라고 보았다. 그의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이 난다.
“개인은 이 긴 노력을 아웃사이더로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자(聖者)로 마칠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자는 중학생 때 대학 전공을 겁도 없이 철학으로 정했다. ‘인간 존재의 의의와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웃사이더>의 주제의식은 영화 <매트릭스>와도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모피어스 일당은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고 나서 인공 자궁을 벗어난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가며 기계에 짓눌린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지 않는가. 그리고 그 중의 한 명인 네오는 매트릭스의 모든 규칙을 꿰뚫어 보고 초월하는, 성자와도 같은 고귀한 존재로 승화되고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속에서 SF적인 문법으로 표현된 현대 사회를 본다. 영화 <매트릭스>는 관객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마음의 눈을 띄워 진실을 보게 해 줄, 모피어스의 빨간 약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