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중의 뜨거운 전략게임 TPP, AIIB
아세안경제공동체 출범과 미중일의 패권적 경쟁
2015년 12월 31일 아세안경제공동체(AEC: ASEAN Economic Community)가 출범한다. 이미 예견돼 있는 것이었지만 2007년에 AEC 청사진을 발표한 지 8년 만이다. 경제규모를 보면 2014년 기준으로 인구 6억2000만 명, GDP 2조5000만 달러, 1인당 소득 4000달러의 공동체 출현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인구는 12배, 경상가격 GDP는 약 1.8배, 그리고 구매력평가에 의한 GDP는 3.8배에 이른다.
물론 아직 갈길이 멀다. 아세안 10개국은 소득수준, 산업구조에서 큰 차이가 있다. 통합의 과정에는 수많은 난관이 예상된다. 그러나 역내 비관세장벽이 철폐되면서 상품과 서비스 시장 통합은 진전될 것이다. 아세안은 AEC 창설을 통해 상품, 서비스, 투자, 숙련인력,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해 역동적이고 경쟁력 있는 단일 시장이자 생산기지로 변화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10월 초 미일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 협정(TPP)이 타결되고, 한중 FTA가 비준돼 12월 20일 발효된다. 올 5월 창립준비를 마친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내년 초 공식 출범한다. 여기에 2015년 5월엔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이 추가로 가담해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가 주도하는 5개국의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이 이미 출범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넘어 유라시아는 새로운 경제질서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포스크 경영연구원이 발행하는 <친디아 플러스>의 동의를 얻어 아세안 통합을 한단계 발전시킬 새로운 경제공동체 등장의 배경과 의미, 그리고 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중국 사이의 패권적 경쟁을 세번에 걸쳐 조망한다.
1. 아세안경제 공동체(AEC) 출범 배경과 의미/ 박번순 고려대 경상대학 경제학과 초빙교수
-조밀한 분업과 넓은 시장 향해 출항
2. 미·중의 뜨거운 전략게임 TPP, AIIB/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아세안의 생존법으로서의 AEC
3. 중국 일본의 ‘경제전쟁’- 일본 뒷마당으로 밀려드는 차이나 파워/심상형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일본의 촘촘한 생산망과 중국의 인해전술
2015년 한 해도 어김없이 이 지역의 경제협력과 관련된 알파벳의 향연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경제협력, 경제통합들의 이면에는 주도 국가의 지정학적(geo-political), 지전략적(geo-strategic), 그리고 지경학적(geo-economic)계산과 이해득실이 복잡하게 깔려 있다. 경제통합과 협력의 이니셔티브들은 이런 전략적 계산까지 고려에 넣을 때 비로소 전체 그림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계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T P P·Tr a n s -P a c i f ic Partnership)은 미국 주도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가들을 묶어 국가 간 자유무역을 실현하는 이니셔티브다. TPP는 2006년 브루나이·칠레·뉴질랜드와 싱가포르로 출발했다. 이후 오바마 정부 들어 미국이 TPP 확대를 강력히 추진했다.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Pivot to Asia)에서 TPP는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초기 미국의 대아시아 균형정책은 새로운 다자주의와 경제적 관여(engagement)로 요약된다. 아시아 지역의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EAS·East Asia Summit) 등 자생적 다자주의에 적극 참여하면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활로를 아시아에서 찾으려고 생각했다. 즉 미국 입장에서 TPP는 대아시아 균형정책의 경제적 수단이다. 미국의 대아시아 재균형 정책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2011년 미국의 EAS 가입으로 동아시아 지역협력에서 독보적인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한 중국은 새로운 구상을 펼쳐들었다. 바로 2013년에 제시된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전략이다. 일대일로는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연계를 상정했다. 일대일로는 단순히 경제적 연계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를 앞세워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도서국, 중앙아시아, 서남아, 그리고 중동의 개도국에 중국의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을 건설하려는 야심찬 계획이 일대일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일본·서방국가가 주도하는 국제금융·지역금융을 탈피하기 위한 시도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Asian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으로 나타났다.
AIIB는 아시아와 서방을 망라한 57개 회원국을 앞세워 다자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일대일로 계획의 인프라 연계성을 높이는 데 매우 효과적인 금융(financing)수단이 될 수 있다.
강대국 틈바구니의 아세안
TPP, 일대일로, AIIB 등 경제로 포장된 강대국의 전략적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는 한편 아세안 10개국은 독자적 생존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아세안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독자적 생존전략을 짜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태동에서부터 지금까지 아세안의 역사는 미-소, 중-일, 미-중 등 강대국의 전략 경쟁 한가운데서 자신의 전략적 가치와 자율적 공간을 모색하려는 노력의 역사다. 아세안공동체는 아세안 국가들 간의 결속을 다지고 내부를 정비하기 위한 상징적인 시도다. 반면에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협정(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Partnership)은 지역의 다른 경제권들과 연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의 복잡하고 중첩되는 경제적 연계를 통해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작업이다.
1997~1998년 경제위기를 겪은 동남아와 동북아 국가들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아세안+3(아세안+한·중·일)라는 지역협력체를 출범시켰다. 이후 중국과 일부 동남아 국가의 주도로 EAS의 조기 출범이 제안됐고, 타협 끝에 인도·호주·뉴질랜드를 포함한 형태로 2005년 EAS가 형성됐다. 1997~1998년과 같은 지역적·동시다발적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향후 유사한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세안+3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Mai Initiative)라는 다자 통화스와프협정을 형성했다. 이는 아세안+3 체제의 가장 큰 경제적 성과로 꼽힌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 아세안+3과 EAS 참여 국가들은 각 국가의 시장을 통합하는 계획, 다시 말하면 지역 FTA를 구상했다. 아세안+3을 기반으로는 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EAFTA·East Asia FTA)이, EAS(아세안+3+3)를 기반으로는 동아시아 포괄적 경제협정(CEPEA·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in East Asia)이 추진됐다.
아세안 생존 전략인 RCEP과 AEC
문제는 어떤 자유무역협정도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서로 발목을 잡는 지지부진한 모습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이에 아세안은 새로운 자유무역협정, 즉 RCEP를 제안했다. 기존 지역 FTA들이 강대국 전략적 고려에 의해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나아가 강대국 주도로 이루어지면서 아세안은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다. 아세안은 아세안+6(한·중·일, 호주, 뉴질랜드, 인도)을 기반으로 한 RCEP를 제안하면서 RCEP는 분명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 경제협정이라는 점을 밝혔다. 다시 말하면 아세안을 중심에 놓고 지역적 자유무역지대 건설에 다시 한번 모멘텀을 부여하는 동시에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시도였다.
한편 아세안경제공동체를 포함한 아세안공동체 건설은 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다. 아세안자유무역지대 추진은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아세안 국가들의 협력 어젠다에 올라 있었다. 1997년 아세안+3 체제, 그리고 2005년 EAS 체제가 형성된 이후 아세안 국가들은 한·중·일 등 주변 강대국과 지역협력에 부담을 느꼈다. 이런 부담은 아세안 국가들 간의 내적 단결력, 결속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낳게 되고, 결국 2003년 아세안 정상들 간에 합의된 발리협정II(Bali Concord II)를 통해 경제, 정치안보, 사회문화 공동체를 통한 아세안공동체 건설이 공식화됐다.
AEC-RCEP의 지정학적 미래
결국 이런 복잡한 전략적 그림에서 드러나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TPP와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AIIB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끼인 아세안의 AEC-RCEP가 나름 자신의 전략적 공간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세안의 생존 전략으로 볼 때 강대국의 적절한 긴장관계는 아세안의 레버리지를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양 강대국에 의해 전략적·경제적으로 큰그림이 그려지고, 이 그림이 지역 전반을 좌우할 때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아세안 국가들은 2015년 말 아세안공동체 건설의 팡파르를 크게 울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 핵심에는 경제통합을 중심으로 한 AEC, 대외적으로 아세안을 중심에 놓고 지역 경제를 연결하려는 RCEP가 있었다. 2015년 아세안정상회의를 목전에 두고 지금 아세안은 미소지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이 주도하는 두 개의 큰 이니셔티브들이 2015년 말 아세안공동체, 아세안경제공동체가 받을 수도 있었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갔다. 단순히 미디어와 사람들의 관심뿐 아니라 AEC와 RCEP는 미·중이 주도하는 이니셔티브 사이에서 전략적 가치도 상실해 가고 있다.
* 이글은 포스코경영연구원이 발간하는 <친디아 플러스> 12월호(Vol 111)에 실린 글입니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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